시의 계시 성격
시인들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맞는다. 물론 실제로는 손으로 쓰는 과정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시작(詩作)의 기술도 포함된다. 그런 시는 영혼을 울리지는 못한다. 영혼을 울리는 시는 영혼에서 나와야 하는데, 영혼의 일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이데거는 <시와 철학 -횔덜린과 릴케의 시세계->에서 시의 존재론적 차원인 언어 사건에 대해서 말한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언어가 말하는’ 사건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언어는 언어가 말하는 것에 대한 응대에 해당된다. 오인태의 시 “시가 내게 왔다”는 아래와 같다.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위에 파르르 떤 달
빛 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이
시가 내게 왔다.
(한겨레신문 2006년 8월14일자에서 재인용)
여기서 시를 하나님으로 바꿔놓고 읽어보라. 그대로 목사에게 해당되는 경험이 될 것이다. 목사가 하나님을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거부할 수 없이 우리에게 온다. 시의 계시 성격과 신학의 계시 성격은 현상적으로 비슷하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가? 목사로서 우리는 그 계시를 어떻게 인식하고 맞이할 수 있는가? 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여기서 대답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것들이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와 신학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런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다. 시인들도 공부를 쉬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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