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처한 위기 상황을 묘사한 다음, 2장에 와서 모세라는 한 인물에 집중한다. 레위 가문의 한 가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난다(1절). 6장 20절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므람이고 어머니는 요게벳이다. 히브리 남자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강에 던져 죽게 하라는 명이 내려진 후의 일이다. 어머니 요게벳은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2절) 차마 강에 던져지 못하고 석 달 동안 숨어서 키웠다. "하도 잘 생겨서"라는 말은 단순히 외모에 대한 말이 아니다.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것이 어머니에게 느껴졌다는 뜻이다.
석 달 후에 어머니는 더 이상 숨겨 키울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갈대 상자에 아이를 넣어 나일 강에 띄워 보낸다(3절).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 아이를 살게 하실 것이고, 아니면 익사하거나 아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아이의 누이는 강물을 따라 가면서 동생의 운명을 지켜 본다(4절).
아기를 담은 상자가 궁궐 근처 갈대 숲에 이르렀을 때,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나일강에 목욕하러 나왔다가 강물에 떠 내려가는 갈대 상자를 본다(5절).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아이를 보자, 공주에게는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6절). 공주는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알면서도 그 아이를 거둔다.
그 때 아이의 누이가 공주에게 다가가 히브리 인 중에서 유모를 찾아 주겠다고 말한다(7절). 공주는 그 제안을 받아 들였고, 그렇게 하여 요게벳은 유모의 자격으로 아들을 키운다(8-9절). 젖 뗄 즈음, 요게벳은 아들을 공주에게 데려다 주었고, 공주는 그 아이를 양자 삼고 이름을 모세라고 짓는다(10절).
묵상:
연극으로 따지면, 1장 1절부터 2장 10절까지는 ‘서막’과 같습니다. 서막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사람은 당시의 절대 제국 이집트의 왕(‘바로’는 이집트 말로 왕이라는 뜻입니다)입니다. 그의 서슬 퍼런 권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은 모두 살해 되었습니다.
칠흙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작은 불을 밝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작은 불을 밝힌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1:17) 히브리 산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남자 아이들을 받으면 모두 나일 강에 던져 죽게 하라는 바로의 명령에 대해 소극적으로 임합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히브리 여인 요게벳입니다. 그는, 살리든 죽이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자는 마음으로 아이를 갈대 상자 안에 넣어 나일 강에 띄워보냅니다.
셋째 주자는 아이의 누이입니다. 그가 갈대 상자를 지켜 보며 나일 강을 따라 내려간 이유는 동생에 대한 엄마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미리암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엄마에게 다시 자신의 아들을 품에 안는 기쁨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의 공주가 그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공주는 아버지가 히브리인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위험한 일을 감행합니다. 차마, 죽음 앞에 놓은 무고한 어린 생명을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과 요게벳과 미리암과 바로의 공주는 모두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에 이끌려 그분이 계획하시는 일을 향해 자신의 몫을 행합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소수자였습니다. 그들은 절대 권력자인 바로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눈 질끈 감고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저항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작은 결단을 묶어서 큰 계획을 이루십니다.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 히브리 산파들과 요게벳과 미리암과 바로의 공주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며 용기를 얻습니다. “세상의 악은 너무도 크고 강한데, 그 악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자주 넘어지는데, 주님은 우리 각자가 각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눈에는 우리 자신이 너무도 작은데, 주님은 그 작은 일들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십니다. 오, 주님, 주님의 큰 그림을 믿고 소망하며 오늘 저희에게 맡겨진 작은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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