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를 두고,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13절)라고 말한다. 5절에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갔습니다”라고 했지만,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났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 “약속하신 것”(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을 뿐이다. “반겼다”는 단어를 덧붙인 이유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살았다는 말은 이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스스로 “나는 길손이요 나그네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의 고향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셈이기 때문이다(14절).
“나의 고향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라는 말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그들은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15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고향은 태어나고 자란 장소가 아니라 앞으로 가게 될 장소를 뜻한다. 그곳은 “더 좋은 곳”이며 “하늘의 고향”(16절)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동경하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소망과 동경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다. 앞에서 언급한 다섯 사람은 인격적으로 완전하지도 않았고 윤리적으로 흠도 많았다. 인간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그들에게 특별히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그분이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다.
묵상:
“고향”이라는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안식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고향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생각도 하기 싫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 합니다. 저와 같은 이민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잠시라도 고향에 가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가 보면, 기대했던 만큼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고향이 그리운 것은, 고향집과 들판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소꼽친구들 때문인데, 이제는 아무도 없기 떄문입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다“던 길재 선생의 글귀가 현실로 느껴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돌아갈 고향”에 대한 생각은 “나아갈 고향”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땅의 고향”을 찾아갈 때마다 느끼는 허전함은 “하늘의 고향”을 더욱 갈망하게 합니다. 세상 떠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도 “더 나은 고향”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진실로, 나는 이 땅에서 길손이요 나그네로 살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간 동안 잠시 장막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에 대한 준비입니다. 이 땅에서의 수 십년 삶이 전채 요리를 먹는 시간이라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은 메인 요리를 즐기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이 땅에서의 나그네 삶을 의미롭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메인 요리에 대한 기대 때문에 전채 요리를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어리석음입니다. 메인 요리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전채 요리를 더 깊이 음미하며 먹는 법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복을 믿고 기대하고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 주어진 일상에 더욱 충실히 임하게 됩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신분을 의식하여 차별성 있는 삶(“구별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는 바른 방법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에게 약속되어 있는 영원한 고향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영원한 고향을 갈망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차별성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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