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저자는 이어서 모세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부모가 바로의 명령을 어겨가면서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 둔 것은 “믿음으로”(23절) 행한 일이었다. 출애굽기 2장 2절에서는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길렀다”고 되어 있다. “잘 생겼다”는 말은 그 아이가 “특별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다”(24절)는 말은 왕자로서의 안락하고 호화로운 삶을 버렸다는 뜻이다. 저자는 그것을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25절)으로 정의한다.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왕자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는 것도 죄이고, 궁궐에서 살아가는 것도 매일 죄를 쌓는 일이었다. 모세는 궁궐에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모세가 당한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26절)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셨다(요 1:1). 그분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나사렛 예수이시다. 모세의 고난은 착취와 학대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맥을 같이 한다. 모세는 모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헌신과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27절)라는 말이, 살인을 저지르고 미디안 광야로 도피한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바로와의 대결 후에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라는 말이 이어지는 것을 본다면, 후자의 해석이 옳아 보인다.
이집트를 떠나던 날 밤에 양의 피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집의 문설주에 바른 것도 믿음 없이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28절).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29절) 홍해를 건넌 것도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따라 하다가 모두 빠져 죽었다.
저자는 출애굽 이후 사십 년 동안의 광야 유랑의 사건에 대해서는 건너 뛴다. 앞에서 장막과 관련하여 길게 논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일어난 일 중에서 저자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야기(30절)와 라합의 이야기를 언급한다(31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야기는 여호수아 6장 1-21절에 나오고, 라합의 이야기는 같은 책 6장 22-25절에 나온다.
묵상: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부름은 자주 우리 자신의 상식과 판단을 뛰어 넘습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세상의 질서와 규범을 거슬러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즐기던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고생을 자초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려면 두 가지의 저항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는 내적 저항으로서 “두려움”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 저항으로서 세상의 반대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 생겨납니다. 그래서 저자는 앞에서 하나님이 1) 계시다는 사실과 2) 반드시 보상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6절)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할 수 있고, 그럴 때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을 세상은 그냥 두고 보지 않습니다. “세상”은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으며, 권세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그들에게 불편을 주고 손해를 입힐 때면, 그들은 반대하기도 하고 박해하기도 합니다. 외부적으로 이런 저항을 받을 때면 내면적인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가 중도에 탈락합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에 질려 스스로 물러나고, 어떤 사람은 외부적인 저항에 부딪혀 포기합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번민과 갈등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은 보지 못합니다. 믿음 없이 사는 길은 안전하지만 권태로운 삶이고, 믿음으로 사는 길은 위태롭지만 신나는 삶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의 타락한 본성은 안전하고 편안한 길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 길은 권태롭고 무의미한 길이요, 허무한 결말로 향하는 길입니다. 저희로 하여금 좁고 험한 길을 택하게 하시고, 그 길 위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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