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설명한 즉자는 계속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계속 남아 있다면 더 이상의 정신적인 성숙도 없고, 삶의 역동성도 없다.
마치 어머니 품 안에 안겨서 무한한 평화를 느끼는
어린아이의 경험에 머물고 말 것이다.
사람은 즉자로부터 대자로 나간다.
대자(對自)는 독일어 für sich의 번역이다.
für는 ‘위하여’, 또는 ‘향하여’라는 전치사다.
für sich는 자체를 위하여, 또는 자체를 향하여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가리킨다.
자신을 대자적으로 인식하려면 자기의 눈이 아니라
다른 이의 눈으로 자기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
대자는 즉자보다 한 단계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대자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에 떨어지지 않고 객관적인 경험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불타는 가시떨기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한다.
거룩한 두려움 자체는 즉자적이며 주관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엄청난 힘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로 나가야 한다.
모세는 거기서 역사적 소명을 다시 경험했다.
그 역사적 소명 경험은 대자적인 것이다.
헤겔의 관점에 따르면 즉자와 대자는 변증법적으로 작용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지양(Aufhebung)된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는 진보한다.
하나님 인식도 이렇게 진보하면서 절대적인 지배하는 때가 온다.
그 때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즉자대자 개념에 대해서 부분에서 잘 아는 분이 있으면 보충 설명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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