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0편에서 다윗은 원수들로부터 고난 당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겠다고 기도했다. 11편에서는 하나님에게만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박한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1절)는 그의 믿음을 흔드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그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불신과 의혹의 음성일 수도 있다.
7편에서 다윗은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원수들에 의해 에워싸인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고 죄악에 손대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늦어지고 원수들의 공격은 점점 거세진다. 그럴 때면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그분의 응답만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 지 의문이 든다. 상황이 다급하면 잠시라도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갈등을 겪는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며 믿음을 흔들기도 하지만, 내면에서도 그런 소리가 들린다(1-3절).
그와 같은 회의와 의문에 대해 다윗은 응답한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분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살피신다(4절). 그리고 의인을 구해내시고,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다(5-6절).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르게 사는 사람은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다(7절).
묵상:
지금 다윗에게는 원수들을 대적하여 싸울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고 칼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오지 않고 원수들의 악행은 더욱 거세집니다. 하나님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점점 어리석어 보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제발 현실성을 찾으라”고 성화를 부립니다. 그 자신도 점점 의문과 회의에 휩싸입니다.
“하나님께만 피한다” 혹은 “하나님께만 의지한다”는 말이 얼른 보면 쉬운 말 같지만 복잡한 현실에서 그렇게 실천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면 광신이 되고 맹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병으로 죽어가는데 하나님께만 의지하겠다고 하면서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악한 자들이 나라를 망가뜨리고 있는데 믿는 이들은 기도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 또 다른 예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전격적으로 개입하여 기적을 베풀어 주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믿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손 떼고 있는 것은 큰 어리석음입니다.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병에 걸렸을 때 의사를 만나보고 약을 복용하고 치료와 회복을 위해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치유가 이루어지도록 동역하는 것입니다. 명백한 부정과 불의가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힘으로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다 보면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명언이 생각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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