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옥중서간(11)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5. 06:14

'공습경보에도 불구하고 자네들이 성령강림절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바란다. 확실히 사람들은 삶의 위협에 직면해서 내면의 세계와 거리를 두는 것을 배운다. 거리를 둔다는 말은 너무 형식적인, 부정적인, 기교적인, 너무 스토아적인 것처럼 들린다. 차라리 사람들은 이런 나날의 위협을 그의 삶 전체 안으로 끌어들인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내가 여기서 관찰해 보건데 여러 가지 것을 동시에 마음에 지닐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비행기가 오면 그들은 그저 무서워하고, 무언가 맛있는 것을 먹을 때는 그저 식욕에 충실할 뿐이다. 희망이 사라지면 절망하고, 약간 이루어지면 그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의 풍요와 자기 존재의 전체성을 보지 않고 스쳐지나간다. 그들에게는 객관적인 것, 주관적인 모든 것이 해체되어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동일한 시간에 많은 다른 삶의 차원을 살아간다. 하나님과 전체 세계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는 자들고 함께 울고, 동시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한다. 우리는 자기의 생명을 걱정한다. 그러나 종시에 우리 생명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회퍼, 옥중서간, 194쪽, 1944년 5월25일 편지)

 

     그대는 위 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소. 어떤 구절이 마음에 와 닿소? 나에게는 기독교인들은 삶의 여러 차원을 동시에 살아간다는 말이 기억에 남소.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거요. 이런 삶의 태도가 그렇게 쉽게 주어지는 건 아니오. 삶을 전체적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하오. 영성은 바로 이런 능력을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 자신의 실존을 성찰하는 게 영성 아니겠소. 당장 당하는 아픔이 힘들다고 하더라도 역시 삶을 전체로 바라볼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다면 그런데서 벗어날 수 있소.

 

     오늘 교회의 신앙생활은 오히려 신자들을 부분적인 것에 매달리게 하는 것 같소. 무언가에 열광적으로 취하게 만든다는 거요. 교회 프로그램을 보시구려. 교회 본질과 상관이 없는 일들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소. 그런 일들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요. 한국교회가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교회당 건축만 해도 그렇소. 한국의 전체 교회를 염두에 둔다면 지나친 교회당 건축은 아예 꿈도 꾸지 않을 거요. 모두 자기 교회에만 관심을 기울이니까 전체 교회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요. 마치 경주마와 비슷하오. 옆의 말을 볼 수 없도록 가면을 쓴다하지 않소. 한곳만을 향해서, 그 한곳이 바로 교회 자체인데, 무조건 달리기만 할 뿐이오.

 

     그대는 본회퍼의 충고대로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도록 하시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시구려. 그런 훈련의 첫걸음은 좋은 신앙서적을 읽는 거요. 약간 신학적인 바탕이 갖춰진 책을 읽도록 하시오. 책읽기를 통한 인식의 변화가 없으면 새로운 영적 시각을 얻을 수 없을 거요.(2010년 5월26일, 수요일, 구름, 햇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