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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과 환대의 식탁(창 18:1~8) /김재홍목사사

새벽지기1 2024. 5. 27. 06:39

'주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보니, 웬 사람 셋이 자기의 맞은쪽에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장막 어귀에서 달려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 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정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 아브라함이 집짐승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하인이 재빨리 그것을 잡아서 요리하였다.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만든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먹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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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연일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반복하는 대한민국 위에도 주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함께하셔서 속히 평안과 안정을 되찾을 수 있길 소망합니다. 지난 주 금요일인 24일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회심 기념 286주년이었습니다.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어느 집회에 참석했다가 마음이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하는 날뿐 아니라 세계감리교회의 시작일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날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안에서 바르게 변화되자 나라가 바뀌고 세계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감리교인뿐 아니라 이 시대의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안에서 바르게 변화되어 이 세상이 더욱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세상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 삼위일체
오늘은 5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께서 하나 되심을 기념하는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교회는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다’라는 교리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며 자주 들어왔기에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설명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교리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그보다 쉽습니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부터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까지 100년이 넘게 교회는 모여서 삼위일체를 놓고 논쟁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쪽과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쪽이 팽팽히 맞서 싸웠습니다. 심지어 서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쪽이 승리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사를 살펴보며 느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셋이면서도 한 분이 되고 한 분이면서도 셋이 되는 수용의 폭이 넓은 분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거룩하신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세 분인 동시에 한 분도 될 수 있다는 신비는 인정하면서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포용하지 못하고 그를 제거해야만 만족하는 폭력적이고 편협한 존재입니다. 거룩을 지향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중적 존재입니다. 이 이중성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극복해야 할 존재론적 과제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삼위일체의 교리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나와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출구 없는 방>에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타인 자체가 지옥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타인을 지옥으로 인식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살기에 자기 생각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타자를 만나게 되면 그를 불편하게 여기기 십상이고 때때로 그 불편함을 폭력으로 표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이도 있습니다. 폴란드의 시인인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이라는 시에서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타자는 다르기에 우리를 새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세계로, 이전에는 알지 못했고 경험해보지 못한 넓은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의 모습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세계가 그런 세계죠.

•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성경 속에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타인을 대해야 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곧,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성경의 중요 주제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낯선 사람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고 정성껏 대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유다의 남쪽 헤브론에 거할 때의 일입니다. 한참 더운 대낮에 세 사람이 아브라함의 집 근처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한낮에 광야를 지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걱정이 되었는지 갑자기 그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들에게 나무 그늘을 내어주고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 대접했습니다. 그 대접은 아주 극진했습니다. 음식도 값진 음식들이었지만 그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자세가 지극정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신하가 왕을 대하듯이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엄청난 환대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그냥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아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쩌다 보니 하나님을 대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를 귀히 여겨 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환대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러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가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기에 예수님의 유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에서 전반부 5,6,7장 소위 ‘산상수훈’이라 일컬어지는 말씀 속에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 들어 있는 것처럼, 요한복음에서는 후반부 13,14,15,16장 속에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당신이 제자들에게 주는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12~15을 읽어보겠습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관계의 두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서열과 위계가 분명한 관계입니다. 인간관계의 많은 부분이 이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단지 주인과 종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차등과 우열을 강조하는 모든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 등등. 이 관계의 특징은 ‘서로 알고는 지내는데 서로를 잘 알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의 마음을, 종은 주인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의 마음을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관계는 ‘친구’입니다. 성별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사회에서 서 있는 위치가 다르고 나이가 다르다 해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종관계에 대비되는 친구관계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서로를 잘 안다’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지요. 일본어로 친구는 도모다찌입니다. 한자어로는 우달입니다. 벗우에 통할달입니다. 통하는 사이가 친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면, 예수님의 마음과 통하는 사이라면, 우리는 예수님과 친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친구는 서로를 알고, 알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더 잘 알게 되고,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사이입니다. 이는 주종 관계에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욱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 또한 거룩을 지향하는 동시에 다름을 이유로 타자에게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는 이중적 존재이기에 초대교회 안에도 많은 갈등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초대교회에는 유대 기독교인과 헬라 기독교인이 공존하였는데 그 둘 사이에는 갈등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로마교회도 그랬습니다. 헬라 기독교인이 유대 기독교인을 보았을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말하면서도 너무 유대의 율법에 얽매여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반대로 유대 기독교인이 헬라 기독교인을 보았을 때, 그들은 율법보다는 믿음을 강조하며 너무 자유분방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박국서를 인용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칭의론의 핵심이 된 이 말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의 차별성을 강조한 말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믿으면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나 다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평등성과 보편성을 강조한 말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과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위해서, 헬라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주신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대인, 헬라인 모두 구세주와 믿음과 구원을 거저 선물로 받았음을 강조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자이기에 아무도 서로를 정죄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35절과 38절, 39절은 아주 감동적인 구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인종도, 율법의 유무도, 그 어떤 인간적 기준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크고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한 편, 자신의 기준을 앞세워 서로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내려 했던 유대 기독교인들과 헬라 기독교인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 환대와 존중의 식탁
15세기에 활동한 러시아의 화가 중 안드레이 루블료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화를 많이 그린 사람입니다. 그가 그린 성화 중 <아브라함을 찾아간 세 명의 천사> 그림도 있습니다. 이 그림은 <삼위일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두 천사와 하나님이 앉아계십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두 천사를 예수님과 성령으로 바꾸어 그렸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있습니다. 세 존재는 얼굴이 똑같이 생겼습니다. 똑같은 얼굴은 세 존재의 일체성을 표현한 것인 동시에 세 존재에게는 다름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강조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 존재의 사이는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인 사이였습니다. 셋은 서로를 깊이 존중하고 사랑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세 분 뒤로 집이 보이는데 그 집은 아브라함의 집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은 어떤 집이었습니까? 낯선 이도 귀한 왕처럼 맞이하는 존중과 환대가 넘치는 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은 존중과 환대의 집이었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바로 그 존중과 환대의 식탁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림을 묵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낯설음과 다름을 넘어 존중과 환대가 이루어지는 자리, 바로 그 자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자리구나.’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러시아가 200여년에 걸쳐 몽골족의 침입을 받아 대량학살을 당하고 무참히 약탈을 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다름이 폭력의 이유가 되던 시절, 루블료프은 존중과 환대의 세상을 꿈꾸며 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우리도 늘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과 존중의 눈빛으로 바라봐주기를.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름을 이유로 나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많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를 존중해 주고 환대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그 수많은 다름을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기고 그 다름을 받아들임으로 둘 모두가 더 큰 세계에 이르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와 이 세상은 여전히 다름이 쉽게 틀림이 되고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회와 세상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기도 하고 전쟁을 일으켜 서로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타자는 지옥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서로를 귀히 여겨 서로 환대하며 살아갑시다. 우열과 상하를 따지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친구가 되어 살아갑시다. 다름을 이유로 서로 끝없이 대립하고 갈등하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이미 하나님의 크신 사랑 속에 있음을 인정하고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갑시다. 거기서 더 나아가 다름을 틀림으로 여겨 배제하기보다 다름을 새롭고 아름다운 더 큰 세계로의 초대로 여기며 살아갑시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낯설고 나와 다른 점이 많은 이를 위해 기꺼이 환대와 존중의 식탁을 차릴 수 있다면, 그 자리는 필경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거룩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도 주신 말씀 의지해 바르고 힘 있게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