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들"(고린도 전서 2:14)입니다.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아무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의 "육신에 속한 사람들"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사르키코이 안드로포스"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과 구별되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아직도 육적인 특징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셋째는 "신령한 자들", "영에 속한 사람들"(고린도 전서 2:15)입니다. "프뉴마티코스 안드로포스" 성령이 내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지칭합니다. 신령한 사람, 프뉴마티코스 안드로포스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거룩한 성숙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신령한 사람 안에는, 시기와 분쟁 대신,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나아가서 신령한 사람들은 남에게도 큰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전도서 3:11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고 솔로몬의 입을 빌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나 깊고 넓어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묵묵히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세상의 권력과 힘이 이기지 못합니다. 이 믿음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모든 절망도 물리치는 소망도, 내 전체를 내어놓는 헌신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극한 상황을 견디게 하는 인내도,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도, 모두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열일곱의 노예가 십 삼 년 만에 총리대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묵묵히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 그것은 우리의 주장을 접어두고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묵묵히 견디는 것입니다. 열일곱 살의 요셉은 언제 어느 때나,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갇힌 감옥에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이집트 황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포석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느 날 꿈을 꾸게 됩니다.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요셉이 즉각 개입을 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창세기 40:8) 하나님께 의뢰한 그 꿈의 내용은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하지만 술 맡은 관원은 훗날 복직되거든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달라는 요셉의 간청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이 년이나 되었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그 긴 기간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이집트의 바로가 꾼, 괴이한 꿈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일곱 마리의 파리하고 흉한 소가 살찐 일곱 마리의 소를 잡아먹는 꿈과 가늘고 마른 이삭이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꿈이었습니다. 그 때에 술 맡은 관원의 머리에 언뜻 스치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이집트의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가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그 말을 들은 요셉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세기 41:16) 요셉의 꿈 해석이 시작되고, 요셉의 명쾌한 말에 모든 사람이 무릎을 쳤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창세기41:38)
요셉은 “꿈꾸는 자”라는 별명 외에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자”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프뉴마티코스 안드로포스입니다. 믿음의 족장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다는 찬사를 들었다는 점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린도 전서 10:31-32)
성도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보는 시각도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2-4)
“믿음의 시련”은 단순한 역경이나 환난과는 다릅니다. 믿음의 시련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한 시련입니다. 요셉은 이 모든 시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그 인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고난은 “믿음의 시련”으로 바뀌었고, 대국의 총리대신으로 그 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까지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게 만들었습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24) ‘미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믿을만하다. 진실하다. 확신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의 명령을 준행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가득 담아주십니다.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복을 나눠주는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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