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하나님의 대책

새벽지기1 2021. 2. 4. 07:29

사람이 눈을 가리고 똑바로 걷는 실험을 했을 때, 20미터를 가면 약 4미터의 오차가 생기고, 또 20미터를 가면 다시 4미터의 오차가 생기고, 이런 식으로 100미터를 가면 결국 한 바퀴 원을 그리며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윤형방황’이라고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좌표를 잃어버리면 자신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제자리를 뱅뱅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것이 우리 각 사람이나 가정, 이 사회나 혹은 이 나라의 이야기는 아닐까요? 눈을 들어 세상을 보니 참 캄캄하고 어둡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길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탈출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하지만 제자리만 맴돌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지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아무 대책이 없다고.

희망의 좌표를 상실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방식으로 탈출을 시도합니다. 하나는 일확천금의 행운을 노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대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곤 합니다. 또 하나의 탈출방식은 ‘하늘의 표적’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어떤 단순하고 절대적인 것을 찾아 방황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이렇게 묻게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이 질문은 ‘당신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 고통의 시기에, 그 혼란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단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주 기이한 답변을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정말 의외의 대답입니다.

요한은 분명 예수께서 메시아인지 아닌지 확답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거기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환기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는 메시아에게가 아니라 지금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고 있는 ‘메시아적 사건들’에 주목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선교의 현장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사건인 메시아적 사건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와 일반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악으로 점철된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부활의 희망을 증거 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희망은, 구름 위에서가 아니라 이 땅의 고난과 모순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할 때 진정한 희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 위에서 시대의 징조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말씀을 들어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성)과 세속적인 것(속)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이원론 때문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이 노래의 2절 가사가 재미있습니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하지만 여러분, 세상을 등지면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밖에 있지 않고 고통 받는 이 세계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세상을 향해야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다 알고 있다는 영혼의 교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구름 위에서 천상의 암호로 말씀하시지 않고, 마치 눈높이 선생님처럼, 자신의 몸을 낮추셔서 우리와 눈을 맞추시며 쉽고 평이한 이 땅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서, 일상 속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침실과 거실과 부엌에서, 우리의 사무실과 회의실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나 신문지상을 통해 때론 사건으로, 때론 양심의 가책으로, 때론 지적 통찰로, 그리고 때론 연민과 슬픔의 눈물 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열린 마음으로, 부드러운 미소로,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눈으로 그 말씀을 보고 듣고 만져보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성도란 누구인가. 성도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들이 보는 것을 똑같이 보되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메시아적 사건들 속에서 생명과 치유와 구원의 희망을 일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 ‘하찮아 보이는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과 은총과 자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세속적인 삶을 통해 가장 거룩한 초월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늘의 표적’ 주시길 거부하신 이유는 ‘하늘의 표적’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하늘의 표적’을 저 멀리서가 아니라 나의 삶의 한 가운데에,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십자가 앞에서 만나고 체험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어린 소녀가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추위에 떨며 동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주머니에 가진 것을 몽땅 털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 전능한 하나님이시라면서요. 당신이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무언가 대책을 세워놓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아니 한동안 할 말을 잊으셨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아주 문득 말입니다. ‘나에게 대책이 없다고 했느냐?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나는 틀림없이 대책을 세워 놓았는데... 나는 너를 만들었다.’

이제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대책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사망과 애통과 아픔과 갈등의 세상 한 가운데에 하나님은 대책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바로 여러분을 지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상품화 되는 이 세상 안에 여러분을 ‘하나님의 작품’(엡 2:10)으로 지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위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희망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이 세상의 끝이 어둠이나 죽음이나 파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하나님의 확증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 귀한 소명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복된 크리스천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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