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처럼 온전히 낮아지고, 하나님이 높아지심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기쁨의 춤이 있다면 참된 기쁨의 모습입니다. ”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에 서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 는 잔치를 베풀고 기뻐할 뿐만 아니라 춤을 추며 즐거워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죄인을 구원하고, 그 죄인의 구원을 기뻐하고 춤추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누가복음 15장 비유를 ‘춤추는 하나님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죄인과 함께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에 넘어지고 실패한 자, 아픔과 슬픔 가 운데 있는 자,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그들을 일으켜서 함께 춤추시는 분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술 취한 사람들이라 비판하며 막아보려고 했지만 성령 안에서 춤추는 이들의 기쁨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화, 제도, 질병도 막을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춤을 추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쁨의 춤으로 인도하십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춤추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하나 님과 함께 거룩한 춤을 추는 것입니다.
다윗과 하나님 임재의 상징물 ‘법궤’
“이스라엘은 자기를 만드신 분을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녀들은 그 왕을 기뻐하라. 춤을 추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탬버린과 하프로 그분께 찬양하라”(시 149:2~3).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춤을 추었던 이가 다윗입니다. 다윗이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이 온전한 기쁨의 모델이 되는 이유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회복하는 것을 기뻐하는 춤이었기 때문입니 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을 기뻐하며 춤추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을 되찾는 일이요, 둘째는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가져오는 일 이었습니다. 그 일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핵심이 법궤에 있었습니 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하나님 임재의 상징물입니다. 법궤에는 세 가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려주신 만나를 담은 항아리입니다. 셋째, 아론이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입니다. 돌판과 항아리와 지팡이는 출애굽과 출애굽 이후 역사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어떻게 여기고, 법궤를 어디에 보관하고, 법궤와 어떻게 동행했는지가 그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주전 1446년경 시내산에서 이 법궤가 만들어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랑할 때 동행했고, 그들의 여정을 인도했고, 요단 강을 건널 때도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가장 먼저 발을 담갔으며, 가나안 정복시대 땅을 분배한 이후 300년 동안 법궤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 되는 장소에 보관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흐름의 역사는 곧 법궤 흐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울 왕 때 깨졌습니 다. 사울 왕 때부터 법궤를 소홀히 여기고, 멸시당하고, 법궤를 통한 인도하심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대표적인 예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법궤를 가지고 와서 전쟁에 나가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법궤를 주신 이유는 그 법궤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라는 것이지, 법궤를 마법 상자처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불안한 이스라엘 장로들은 법궤를 마법의 상자처럼 사용했고 결국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법궤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런데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 진영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법궤를 다곤 신상 옆에 두었는데, 그 다곤 신상이 부서집니다. 독종이 곳곳에 일어납니다. 큰 재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두려워해 다시 반납합니다. 하나님은 법궤를 마법 상자처럼 사용하려는 이스라엘이 패배하게 내버려 두시지만, 법궤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에게는 큰 벌을 내리심으로 법궤와 함께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법궤 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찾아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메고 와야 하는 것을 수레에 끌어서 편리하게 움직이려다 웃사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법궤의 이동을 국가적인 행사로 확대했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3만 명의 대표를 뽑아 동행하게 했습니다. 나라의 온 악기를 동원했습니다. 역사상 어떤 나라와 민족에서도 이러한 행사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다윗은 법궤를 소중하게 생각했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법궤를 주신 목적을 알았고, 어떻게 법궤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해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법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바로 그때 다윗은 기뻐하며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온전한 기쁨의 춤
“다윗은 베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의 온 집들이 나팔을 불고 환호하며 여호와의 궤를 모셔 왔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에 들어올 때 사울의 딸 미갈이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미갈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껑충껑충 뛰며 춤추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비웃었습니다”(14~16절).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는 다윗의 춤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회복하는 춤이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는 춤이었기에 온전한 기쁨의 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기쁨은 슬픔이 없는 기쁨이 아닙니다. 슬픔의 내용이 변해서 기쁨이 되는 것이 온전한 기쁨입니다. 이 세상은 슬픔과 기쁨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슬픔은 슬픔이고 기쁨은 기쁨입니다. 기쁨은 슬픔이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온전한 기쁨은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많은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핍박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습니다. 광야를 헤매야만 했습니 다. 마음속에 사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해치지 않았고, 슬픔을 통과하여 왕이 되고, 그 나라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변화시키는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주께서 내 슬픔이 춤이 되게 하셨고 내 베 옷을 벗기고 기쁨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시 30:11). 다윗은 우리의 기쁨의 춤이 시작되는 첫 번 째 스텝이 바로 슬픔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쁨의 춤으로 초대하시는 초청장이 바로 슬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삶을 맡기는 출발은 슬픔을 통해서입니다. 슬픔을 통해 우리의 고집이 깨어지고, 슬픔을 통해 우리의 관념이 무너지고, 슬픔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삶에 빛으로 임하시기 때문입 니다. 다윗의 기쁨은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깊은 슬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을 통과한 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의 춤을 추는 것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춤을 췄을 때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을 멸시하고 비판하고 업신여겼습니다. 남편 다윗은 3만 명의 대표들 앞에서 법궤를 모셔오는 것을 기뻐하고 가장 앞장서서 자신의 베옷이 벗겨지고 속옷만 입은 채로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내는 남편을 창문을 내다보며 비웃었습니다. 미갈의 영과 태도가 바로 우리가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고 구경자로 나갈 때 빠지는 오류입니다. 우리가 예배자가 아니라 구경자로 참여할 때 소리높여 부르는 찬송이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예배자의 일원으로 참여하지 않고 창문으로 구경하는 미갈처럼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는 그 사람만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춘 기쁨
“다윗이 미갈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춤춘 것이오. 그분이 당신 아버지와 당신 집안 대신 나를 선택해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세우셨으니 나는 언제든 여호와 앞에서 기뻐 뛸 것이오. 내가 이것보다 더욱 체통 없이 행동해 스스로 낮아져도 당신이 말한 그 계집종들은 나를 우러러볼 것이오’”(21~22절). 다윗의 기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 기쁨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높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기쁨이 없습니 다. 교만한 자에게는 언제나 비교의식만 있을 뿐입니다. 사탄의 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비교의식을 불어 넣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고, 심지어 하나님과 비교합니다. 우리에게 기쁨은 겸손할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기뻐할 때 다윗은 기쁨의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춤은 음악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도취되어 잊어버리는 것도 있고, 자신을 낮춰서 잊어버리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춤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인생, 하나님께 서 이끌어 가시는 인생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의 춤을 추는 것은 우리가 자기 부인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출생부터 죽음까지 자기를 부인하며 기쁨의 춤을 추는 삶을 사셨습니다.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성도는 다윗이 경험한 온전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의 기쁨입니다. 슬픔이 없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된 기쁨의 춤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우리 인생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인하여 다윗처럼 온전히 낮아지고, 하나님이 높아지심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기쁨의 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쁨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온전한 기쁨을 경험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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