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

조르쥬 루오전 다녀 온 작은 소감

새벽지기1 2020. 2. 24. 06:30



이동원목회컬럼 - 조르쥬 루오전 다녀 온 작은 소감



8월(2006년)을 여는 날 아침 대전에 소재한 아주 미술관에서의 “이탈리아 판화 400년 전"과 대전 시립 미술관의 조르쥬 루오전을 교우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일종의 문화 기행의 날이었습니다. 늘 목회와 관련된 사역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일탈의 환희속에 경험한 문화는 내 일상의 사고를 판에 박힌 패러다임에서 해방시키는 청량제였습니다. 관상의 틈새를 느끼며 시간의 천박한 한계를 뛰어넘어 경험한 거인들의 세상에서 나는 별 수 없는 유한의 존재임을 확인한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인간의 보편성을 예술의 마당에서 확인하며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은총을 다시 깊이 묵상할수 있는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에드워드 포인터(Edward J Poynter)가 1890년에 그린 유화를 레온 고로뎃(Leon Gorodet)이 1892년에 인그레이빙 기법으로 완성했다는 판화 작품에서 만난 솔로몬 왕은 실로 상상 이상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들의 한송이 백합화보다 못하다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선언이셨는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또한 레오날드 다빈치가 밀라노 수도원 대 식당에 남긴 프레스코화(1495-98)를 1787년 판화가 라파엘 모겐이 완성했다는 “최후의 만찬”은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셋씩 짝을 이루어 완벽한 대칭을 만든 식탁에서 중앙 한 복판에 균형을 잡고 계신 그분은 확실히 질적인 간격을 지니신 주님이심을 느꼈습니다. 우리 중에 계시나 여전히 초월자이신 바로 그분-그래서 나는 그분 앞에 늘 작아 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그를 부끄럽게 하는 또 한 명의 제자이었습니다.

장소를 시립 미술관으로 옮겨 루오의 원작들을 대하면서 나는 아내가 그렇게도 루오를 좋아하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하루였습니다. 나는 전 보다 훨씬 더 아내를 이해하고, 훨씬 더 루오를 이해하게 된 느낌이 야릇한 어떤 행복감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 검은 윤곽선으로 처리된 포장 없는 실제 인생들-판사, 광대, 창부-모두가 죄인인 것이 그렇게도 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이 말씀이 가슴을 맴돌아 회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을 재판하는 법관들에게서 오히려 판단 받아 마땅한 위선을 보고 있었고, 그가 본 창기는 아름다운 유혹의 대상이 아닌 연민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마 가장 많이 눈에 띤 광대, 피에로를 통해 그는 인생은 한바탕의 연기요 놀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광대들에게서 묻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실존의 자연스러운 풍경임을 그는 나에게 반복적으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아 “미세레레”!-나는 자연스럽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루오는 그가 남긴 글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우리 시대의 전도자요 사상가인 촬스 콜슨이 루오를 가리켜 가장 “복음적인 화가”라고 말한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후반에 갈수록 더 그리스도에게 집중된 것은 결국 그가 인생의 해답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의 습작의 초기에는 도미에(일종의 민중 만화가요 판화가)류의 사회 고발등의 영향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가 결국은 그의 구원이었고 우리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루오전은 전시회 주제어로 “영혼의 자유를 지킨 화가”라고 타이틀을 부여했지만 내게는 보다 적절한 주제어로 “영혼의 구원을 경험한 화가"로 다가왔습니다. 나도 이제 내 아내를 따라 오래 동안 아니 어쩌면 루오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벌써 루오의 그림자가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의 열대야를 피하고자 창을 열었더니, 검고 희고 그리고 강렬한 원색의 창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기웃거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슬프고 행복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