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사건과 부활 신앙 (2)
I. 부활 사건을 무시한 부활 신앙은 공허한 신앙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적으로 보나 학문적으로 보나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역사적인 증거의 법칙이나 법률상의 증거의 법칙이나 문헌상의 증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어떤 사건보다 더 잘 입증된, 가장 확실한 사건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다. 부활 사건은 이렇게 확실한 것이지만 내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역사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부활의 역사적 사건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와 관계해서 실제적인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내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고 받아들이고 도마처럼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부활신앙을 말할 때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해마다 부활절이 오면 부활절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 중에 부활의 역사적 사건은 중요하지 않고 오늘 우리가 부활신앙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자들을 발견한다. 이런 메시지의 뿌리는 부활사건을 무시한 부활신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건적인 역사(Historie)는 중요하지 않고 실존적인 역사(Geschichte)가 중요하다는 사상이 그런 메시지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1. 루돌프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The Historical Jesus and the Kerygmatic Christ)라는 책에서 시체가 일어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면서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가 부활한다고 주장했다 (p. 42).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빈 무덤이라는 식의 얘기는 불트만이 볼 때 부활에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불트만은 복음이 선포될 때 예수님이 그 선포되는 내용 속에 살아 계셔서 청중과 실제로 만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한 것이다. 불트만의 부활관은 부활의 역사적 사건을 무시한채 부활의 실존적 의미, 즉 부활신앙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2. 안병무 교수는 <성서적 실존>이라는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설명할 때 자신이 본 환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pp. 316-17). 예수의 "시체는 군중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시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시체는 한낱 죽은 살덩어리가 아니라 그 왕의 학정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였다....아니, 그것은 인간의 모든 죄와 고뇌, 슬픔과 불안과 절망의 시체였다. 이 때 그들에게는 계시와도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것은 저 시체가 바로 내 것이 아닌가, 잃었던 <나>가 아닌가고 생각됐던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신은 바로 우리의 패배와 고난, 능욕과 저주를 제 몸에 걸머진 이 젊은이가 아닌가! 마침내 이 무리들은 초라한 수난자를 우리의 신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안병무 교수는 예수님의 죽은 시체를 보면서 그 속에서 "잃었던 <나>"를 발견하고 "우리의 패배와 고난, 능욕과 저주를 제 몸에 걸머진 이 젊은이" 예수가 자신들의 신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라고 했다. 안병무 교수는 "예수가 불법자의 손에 죽음으로써 바로 그들의 손에 죽어간 수많은 죽음을 대신했고 또한 그 죽음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부활은 불법자에들에게 당한 억울함, 패배, 수치, 모욕, 고통에 짓눌려 죽어간 저들을 살려 일으킨 첫 열매인 것이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최후의 무기로써 휘둘러 온 권력자들의 위협과 그 죽음의 공포에서 인간을 해방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안병무 교수가 말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부활한 사건이 아니라, 한많은 민중이 권력자들의 죽음의 위협에서 해방받아 죽음과 대결하여 그 위협 아래에서도 살아 있다는 부활 신앙이다.
3. 불트만과 안병무 교수는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믿는 실존적 신앙이나 권력자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민중을 해방시킨 실존적 부활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역사성이 부인되거나 약화되거나 무시되는 상황에서의 실존적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무의미하고 공허한 신앙이다.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성경 고전 15:14-19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적으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공허하고 우리의 믿음도 공허하며 우리의 희망도 공허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들이 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복음 선포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불트만의 주장도 무의미하고 권력을 대항한 한 젊은이의 희생적 죽음 속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다는 민중의 해방도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부활의 역사성에 뿌리 박지 않은 부활의 실존적 의미는 기독교 복음의 공동화(空洞化)를 가져온다는 것을 증거한다. 부활의 역사성이 없는 부활 신앙을 주장하는 것은 뿌리가 없거나 잘린 나무 위에 신자들을 올려 놓는 것과 같다. 부활 사건이 없는 부활 신앙은 인생 광야의 모진 바람이 불면 여지 없이 무너진다.
4.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말할 때는 필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부터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진리를 전제해야 한다. 부활 신앙은 부활 사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지적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
는 것은 신구약 성경의 확고한 증언일 뿐 아니라 유명한 역사가들과 법률가들과 문헌학자들의 증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잘 입증된 사건이고 법률상 가장 확실한 사건이며 문헌상 가장 잘 밝혀진 사건이다.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고 뒤집을래야 뒤집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사건은 하나님의 절대적 신실성과 확실성의 보장을 받는 절대 확실한 사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주의 총사령관이신 하나님의 인감도장을 받은 우주적 확실성을 지닌 사건이다. 이제 이렇게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근거하여 부활의 신앙을 거론해야 한다.
유명한 신약신학자 조지 래드(George E. Ladd)는 그의 <신약신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p. 320).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창출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발생했다. 여기에 핵심적인 이슈가 있다. 제자들의 신앙이 부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들 배후의 사건이 그들의 신앙을 창출한 것이다. 그들은 신앙을 잃었었다. 그들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눅 24:25). 부활의 사실과 부활에 대한 신앙은 불가분리적이지만 동일한 것이 아니다. 사건이 신앙을 창출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근거한 부활 신앙은 어떤 것인가?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존적 의미는 무엇인가?
II.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현재생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사건은 최고로 확실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의 역사성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살아 나셨다"는 것을 믿을 때에 믿는 자들의 현재 생활에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신자들의 부활을 보장하는 첫 열매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미래의 부활에서만 찾는 것은 한 쪽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능력이다.
1. 슬픔과 불신에서 기쁨과 경배로 변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은 사건이 그를 따르던 제자들을 슬픔과 절망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그들의 슬픔과 절망은 기쁨과 희망으로 바꼈다.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큰 기쁨"을 맛보았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 (마 28:8-9). 열한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너무 기뻐"했다 (눅 24:41; 요 20:20).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경배했으며 (마 28:16)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했다
(눅 24:52-53).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감격의 신앙고백을 했다 (요 20:28).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삶을 살았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은 명백한 사건이므로 이것을 믿으면 믿는 자의 생활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로 바뀐다. 부활 사건을 계속 믿으면 폭풍노도가 끊임없이 이는 이 세상에서 기쁨과 경배의 삶을 살게 된다.
스펄젼 목사님이 존 켐벨 박사님의 집에서 어느날 이런 얘기를 들었다. 어떤 목사님이 무어필즈에 있는 윗필드의 옛 성전에서 설교하는데, 그날 저녁 아주 방탕하게 살아가는 두 젊은이가 아주 무서운 죄를 짓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만일 그 죄를 지었다면 일생토록 그 결과에서 벗어나지 못할 죄를 짓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 무어필즈 성전을 지나고 있을 때 그 불경한 작업을 하기 위해 시간을 맞추려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 봐. 저 안에는 분명히 시계가 있을 거야"라고 했다. 그러나 시계는 설교자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반대편에 있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시계를 보기 위해서 낭하 상당히 깊이 들어가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그 때 설교자가 이상한 소리로 설교를 해서 젊은이의 주목을 끌었고 그 젊은이를 낭하에 그대로 붙잡아 매 두었다.
기다리던 젊은이는 다른 젊은이가 왜 안나오나 싶어서 자기가 들어가서 직접 시계를 보고 친구를 끌고 나와야 겠다고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주님의 화살이 두 젊은이의 가슴을 찔렀다. 두번째 젊은이는 존 윌리암스로서 후에 에로망가에서 순교한 유명한 선교사이다. 무서운 죄를 짓기로 한 젊은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에 부딪히게 될 때에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조쉬 맥도웰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1,000 시간을 연구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도 마음은 계속 다른 방향으로 자신을 끌어갔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를 깨뜨리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맥도웰은 자기 인생의 파티를 망치는 자가 자기 인생 속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었으나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예수를 자기 마음에서 떨어 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 그는 모든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마음이 열려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일에 있어서는 콱 닫혀 있었다. 뇌가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이 고민이 심했다. 마침내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항복을 했다. 그 후에 그는 마음의 평안을 느꼈고 혈기를 통제할 수 있었고 자기가 증오하던 자기 아버지에게 "아빠, 아빠를 사랑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은 맥도웰의 삶이 변화된 것이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새생명: 바울은 롬 6:4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신비스럽게 연합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에 같이 죽고 장례되실 때에 같이 장례되고 부활하실 때에 같이 부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지금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신자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들인데, 신자들은 이런 신분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사람은 자기를 노예로 부리던 주인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옛 주인이 무엇을 하도록 아무리 명령을 해도 순종할 의무가 없다. 신자들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의의 종들이 되었기 때문에 죄가 자기에게 순종하도록 명령할 때에 거기에 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그 속에서 약동하게 되는 것이다.
3. 죄인을 의롭다 하시기 위한 사건: 바울 사도는 롬 4:25에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증언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기 때문에 죄인들인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공로에 근거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법정적인 선언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단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역으로 영역이전을 하게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4. 날마다 죽을 수 있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 바울은 고전 15:31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자신 속에서 약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날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신자들 속에 역사하고 있다. 바울은 엡 1:19에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지적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를 위하여 날마다 죽는 삶을 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 더욱 강하게 우리 속에 역사하신다는 점이다.
바울은 고후 4:11에서 "우리 산 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은 신자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나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fact)일 뿐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에 근거한 능력(force)이다. 그것은 역사와 문명의 코스를 바꾼 사건과 능력인 것이다. 우리는 부활능력을 받아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등 땅에 있는 지체들을 죽이고 위엣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골 3:1-5).
5.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건설: 성경은 엡 2:13-14에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 둘을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한 가족 된 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들로서 총체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사람들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성한 것을 볼 수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여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4-47).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은 개인을 구원하는 원동력일 뿐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안병무 교수는 <성서적 실존>이라는 책에서 3.1 운동과 4.19 의거는 "불법자와 불의한 자들의 손에 죽은듯 했던 민중들이 죽음과 대결하면서 그 위협 아래에서도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한 사건"으로서 "불법자의 손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의 구현"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p. 318). 3.1 운동과 4.19 의거가 정치적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독재에 맞서서 싸운 정의의 운동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런 운동을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의 구현으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너무 얕게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의 사회적 의의는 정치운동을 통해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차원보다 훨씬 깊이 들어가서 예수의 부활생명이 죄인들인 인간들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들 속에 예수의 정의와 평화의 생명이 약동하게 하여 그들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데 있다.
III.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미래생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슬픔과 좌절을 기쁨과 경배로 바꾸는 사건이며 죄인을 의롭다 하는 사건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생명이 약동하게 하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날마다 죽음을 무릅쓰게 하는 원동력이고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에너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처럼 성도의 현재생활에 생명과 능력을 제공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성도의 미래생활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원천이기도 하다.
1. 신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 일부가 신자들의 부활을 부인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사건을 제시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밝혀서 부활신앙의 토대를 든든하게 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신비스러운 연합을 한 사람들의 부활을 보장하는 사건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첫 열매는 다음 열매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약속하고 보장하는 징표이다. 바울은 이 점을 설명할 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다 (고전 15:22). 이것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들이 죽은 것 같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모든 신자들이 부활생명에 동참하게 된다는 언약의 원리이다.
2. 영광스러운 부활체: 앞으로 주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죽은 신자들은 육체적으로 부활하고 살아 있는 신자들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죽은 신자들은 현재와 같이 죄와 사망으로 시달리는 연약하고 천한 몸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고 강하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살아 있는 신자들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 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이다 (고전 15:42-44,51).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은 나사로처럼 (요 11:1-44) 단순히 죽었다가 본래 상태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몸으로 부활하셨다면 연약과 노화와 죽음에 지배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과 노화와 죽음에 지배받지 않고 영원히 사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어떤 경우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로 알아 보았지만 (마 28:9,17; 요 20:19-20, 26-28; 21:7,12), 예루살렘의 11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했으나 (눅 24:33,37) 예수님의 손발과 구운 생선 드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 보았다.
이런 것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과거의 예수님의 몸과 달라 보였던 것 같다. 과거의 예수님은 고난과 역경과 슬픔을 당하셨던 모습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완벽한 젊음과 완벽한 건강을 지닌,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이었다 (고전 15:53). 부활하신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계신 것을 분명했지만 (마 28:9; 요 20:15,20,27; 21:12-13) 그 몸은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실 수 있는 것이었다 (눅 24:31,36; 요 20:19,26).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영광스러운 부활체였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거나 변화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발과 옆구리에 상처가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요 20:27)에 근거해서 우리도 완성된 천국에서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은 그의 <조직신학>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경우는 우리를 위한 고난과 죽음의 영원한 증거로 상처를 간직하셨지만 우리들의 경우는 상처가 완전히 치료되어 완벽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했다 (p. 616).
3. 사망에 대한 최종 승리: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우리의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그리스도의 승리에 삼킨 바가 될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죽은 신자들이 부활하고 산 신자들이 변화되는 것을 말하면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사망을 향해 호령을 했다 (고전 15:55). 그러면서 바울은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 (고전 15:56-57).
"사망의 쏘는 것"은 "사망의 독침"이다. 죄가 없으면 사망은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 죄 때문에 죄의 값으로 사망이 인간을 치명적 독침으로 쏜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것은 죄가 죄로 드러나는 것은 율법 때문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침내 사망을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이기게 되는 것이다.
16년간 위튼 대학교 교수를 한 에피 제인 윌러(Effie Jane Wheeler) 박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교수회와 학생회 앞으로 이런 편지를 보냈다. 드디어 주치의가 수주간의 진찰 결과를 알려 주었습니다. 수술할 수 없는 췌장암이라는 것입니다. 그 의사 선생님이 만일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그렇게 지체하면서 알릴까 말까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아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살면 삶도 환영하고 죽음도 환영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가 주님에게 속히 가는 것을 원하신다면 저는 기쁘게 갑니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는 여전히 위대한 의사시라는 것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래서 소박하게 믿고 신뢰하면서 저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주님이 원하신다면, 저를 완치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아주 평안하게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를 한 순간도 애도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을 생각하듯 저에 대해 행복과 기쁨의 생각을 하십시오.
거기 있는 모든 것, 학생 기념 센타와 그 뒤에 있는 건물들, 모든 기쁨과 경쾌함이 있는 졸업식 행사들에 대해서 여전히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차가운 안녕을 고하지 않고, 오히려 또 만납시다(auf Wiedersehen)는 따스한 안녕을 고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다가오는 가을 캠퍼스에서나 혹은 그 후에 저 복된 땅에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이라고. 여러분이 그리로 오실 때는 제가 커튼을 걷고 맞이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각자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에피 제인 윌러. 윌러 박사는 부활신앙으로 사망을 이긴 자답게 살아간 것이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확실히 발생한 사건이다. 부활 사건은 역사상의 증거나 법률상의 증거나 문헌상의 증거로 보아 도저히 뒤집어 엎을 수 없도록 확실한 사건이다. 이러한 부활 사건을 믿으면 현재적 삶과 미래적 삶이 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우선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하는 선언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신비적 연합의 축복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능력으로 나타나서 날마다 죽음을 무릅쓰면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개인의 생활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근본적으로 변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개인적으로 변화될 뿐 아니라 부패하고 무능한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대안사회를 이루어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이렇게 현재적 삶이 변할 뿐 아니라 미래적 삶도 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죽은 상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과 같은 몸으로 부활하게 되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렇게 영광스러운 몸으로 순식간에 변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으로 죄와 사망을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이기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것을 믿는 자들을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변화시키되 현재의 삶도 복되게 하고 미래의 삶도 복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두고 그 역사성과 실존성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여 부활신앙을 흔들리게 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게 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구현하는 일을 더욱 힘써야 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