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4

외적 현상들은 단지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안내자 역활을 할 뿐이다.

새벽지기1 2017. 11. 23. 07:58


3년 전에 20년 만에 영국을 방문햇다.

걱정했던 것은 운전하는 방식이 오른 쪽이라는 것이었다.

막상 영국에 이르러 운전할 때 서툴렀다.

근데 10여 분 정도 운전한 뒤 자연스럽게 운전했다.

몸이 20년 운전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웠다.


어제 의정부에 있는 코스코를 가기 위해 점심을 먹으려 했다.

일전에 갔던 식당이름이나 주소를 기억하지 못해서 찾아보았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자 나는 내 몸과 눈에 맡기기로 했다.

의정부에 도착하여 감각에 따라 운전했다. 원하던 식당에 이를 수 있었다.


내 몸과 감각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몸이 기억한다는 것이 뭘까? 오

랫동안 타지 않던 자전거나 어떤 기술 역시 몸이 기억하고 있다가

상황이 되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한다.

일종의 정신적 작용이라 여긴다.

누구든 몸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안정된 정신에 이르면 정신이 그것을 행하도록 몸에게 명한다.


이처럼 신앙생활에서 경건한 자가 세속의 물결이 힘들거나 넘어지거나 들뜨는 경우가 있다.

이때 그들은 당황하거나 좌절하는 경우가 있다. 한 마디로 약한 믿음이다.

이것을 강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일반 성례를 보인다.

다른 말로 "달콤한 은사"라고도 하고, 환경이라고도 말한다.

가시적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시고, 환경을 통해 격려한다.

흔히 "체험적 신앙"이라고 부르는데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속길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지 말씀을 깨닫게 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한다. 가시적 현상은 약한 믿음의 위한 것이고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할 뿐이다.

말씀을 통해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한다.


단지 믿음이 강화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에 얽매여서 은사에만  집중한다면 ,

결국 연약한 믿음은 여전히 약한 가운데 아니 자라지 않는 가운데 머물고 말 것이다.


운전하다가 몸이 기억한다는 것은 그 분위기와 익숙한 환경에 접하다보니 심정이 평안해졌다.

길로 제대로 찾았다고 마음에 평정을 찾는 것이다.

수차례 유럽 여행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하곤 한다.

내비게이션으르 의존하면서 운전한다는 것이 힘들다.

그때는 직면한 환경이 나를 평정을 안겨다 준다.

그러면 그 환경 다음에 무엇이 잇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운전

역시 실수하지 않고 길을 지나거나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경건한 자가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가도록 한다.

심판대 앞에서 그 증거를 갖도록 한다. 그 증거는 믿음의 결과들인 선행이다.

그 선행은 믿음의 증거일 뿐이다.

그것으로 말씀의 뜻을 파악했다고 함부로 상상하면 안 된다.

외적 현상들은 단지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안내자 역활을 할 뿐이다.


그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순종하기에 이른다면

그 외적 증거는 믿음의 강화에 합당한 역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 가시적 은사에 매몰되어 그 이상을 보지 않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으니

여전히 믿음이 약하거나 아니면 믿음의 선물을 받지 않았는데 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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