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살아 있는 현재적인 말씀이지 만고불변의 진리나 원리가 아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윤리 체계를 만드는 일은 애당초 말이 안 된다.
하나님 말씀으로 기독교 윤리 체계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우리 손아귀에 움켜쥐고 흔드는 오만방자한 일이다.
자크 엘륄은 말했다.
“아담의 손에 들어간 피조물은 고난의 동산으로 되었고,
이스라엘의 손 안에 들어간 율법은 바리새적인 결의론이 되었고,
우리 손에 들어온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과거화시켜 인간의 것으로 만들 경우에
그것은 거짓 계시가 된다.”(원함과 행함. 167쪽).
옳다. 기독교 윤리를 체계화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기독교 윤리를 체계화하는 일체의 행위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침해이자 사기이며,
기독교 윤리를 세우려는 인간의 의도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줄곧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그 일, 한없이 오만방자한 그 일을 해왔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윤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해왔고,
믿음생활을 강조하면서 처세술이나 기독교적 윤리의 삶을 추동해왔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을 우리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일이라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채.
여기서 우리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윤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기독교 윤리는 필요 없는 것일까?
당연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기독교 윤리는 성립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윤리는 필요하다.
참, 말이 안 된다. 불가능한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윤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있을 수 없는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필요하다.
왜일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공 속에 주어지지 않고
복잡다단한 세계의 현실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윤리적 차원에 갇힐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윤리적 차원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모인 교회조차도 인간사회이고
교회가 인간사회인한 윤리는 필요한 법이니까 기독교 윤리는 필요하다.
사실 인간은 윤리 없이 살 수 없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인간의 삶은 선악이라는 윤리적 차원으로 떨어져버렸기 때문에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은 윤리라는 체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일거수일투족이 윤리적 체계와 연루되어 있다.
우리가 들은 것은 비록 윤리화될 수 없는 하나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실행해야 하는 삶의 현장은 철저하게 윤리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윤리적 현실성이 요청된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도 윤리가 요청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윤리가 요청된다.
심지어 교회당을 짓고 예배드리는 행위에도 윤리가 요청된다.
기독교 복음은 윤리가 아니다.
기독교 복음이 윤리가 되는 순간 기독교 복음은 왜곡되고 파괴된다.
그러나 복음을 담보하고 있는 기독교는 복음적 윤리를 필요로 한다.
정말 모순이다. 그러나 이 모순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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