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예수의 재림

새벽지기1 2017. 4. 26. 13:04


예수의 재림


대림절(Advent)이라는 단어는 도착(영:arrive, 독:Ankunft)을 뜻한다.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오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듯이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기다리면서 대림절을 보낸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대림절 기간만이 아니라 한해 전체가 바로 기다림의 시간들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목을 매고’ 사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모를 게 하나도 없다. 2천 년 전 초림하셨던 바로 그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말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돌리면 이 사실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그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바로 그 모습인가?


그 당시의 예수님은 삼십대 초반의 유대인 한 남자이셨다. 공생애 이전에는 목수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재림의 예수님이 바로 그런 한 유대인 남자라고 한다면 오늘 여자들이 반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의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이미 부활체로 변형하신 예수님에게서 그 이전의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예수 세미나’에 속한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인 ‘역사적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으며, 바로 그 모습으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하신다는 뜻인가? 만약 구름을 타고 재림하신다면 지구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재림하는 쪽에 사는 일부만 그 광경을 목도할 것이다. 한국에 재림하신다면 티브이 중계를 하면 모를까 브라질에서는 그것을 직접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구름을 통한 승천을 바로 재림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구름 사건은 사실에 대한 보도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신화적 서술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화적’이라는 말을 아주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자유주의자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이런 태도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오늘 우리의 세계관도 많은 세월이 흐르면 신화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신화적인 세계관 안에서 살았지만 그들이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어떤 궁극적인 실질을 경험했고, 그런 방식으로 서술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말의 실체적 진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걸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재림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바로 그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씨앗이 땅속에서 움을 트고 땅밖으로 나와야 세계를 경험할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그것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재림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존재유비를 발견할 수 없다.


예컨대 지금의 세상에서 우리는 밥을 먹어야 사는데, 밥을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저 세상을 우리가 무슨 수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말하지 그 재림으로 실현될 생명의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에 의해서 생산되지 않는 그 생명의 세계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된다는 신앙이 곧 대림절 신앙이요, 재림 신앙이다.


재림이 일어나야만 재림의 실체를 알 수 있다면 결국 예수님의 재림은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성서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세상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누누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심판도 그중의 하나이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대심자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그가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 판단은 단지 교회에 다녔나 아닌가, 더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인가 아닌가의 기준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생명의 기준으로 실행될 것이다.


진리가 온전히 드러나는 심판을 통해서 이 세상은 완성될 것이다. 세상의 완성은 곧 영생이다. 그 영생이 종말로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며 열매라 할 수 있다. 이 영생은 종말에 시작하겠지만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선취(先取)되었다. 기독교인은 영생이 온전히 실현될 종말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역사의 한 가운데서 살아간다. 그 영생이 실현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은 오늘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인지 논증해야 한다. 우리가 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지를 변증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현실이 구체화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다. 이것을 유보하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대림절이 교회력의 시작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예수님은 곧 오신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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