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병수교수

돈을 사랑함 (딤전 6:9)

새벽지기1 2017. 3. 21. 07:34


최근에 출판된 책에서 미래학자인 자크 아탈리는 세계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추구되던 부의 창조가 기독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복이 아닌 것이 되었고, 상업적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와 개인주의가 후퇴했으며, 진보는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와 ‘부’의 관계 부각돼

이런 주장은 기독교에 관하여 적어도 두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미래학자가 보기에도 기독교는 일반적인 인간 정신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등장은 물질만능주의로 흐르던 세계의 역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그만큼 기독교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위의 주장에는 허구가 숨어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물질관을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물질관을 몇 마디로 정리하기에는 쉽지 않지만 그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기독교는 절대로 부를 부정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어 누리게 하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이다(딤전 6:17).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에도 그리고 이후에 사도들의 협력자들 가운데도 풍부한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쉽사리 증명할 수 있다.


나아가서 기독교는 재물을 필요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성실하게 일하여 재물을 얻는 것을 선이며 복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기들의 손으로 수고하여 일할 것을 권면했고(살전 4:11),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리고 말썽을 피우는 것을 도리어 악한 것으로 간주했다(살후 3:11).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기독교의 물질관이 이기적이 아니라 타익적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베풀어 어리석은 부자를 비판했을 때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부자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었다는 점이다(눅 12:21). 사도 바울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는 까닭은 돈을 탐내는 사람들이 “자기를” 찌른
다는 사실 때문이다(딤전 6:10).


세상과 역사의 비극은 이기적인 부의 추구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기독교가 거절하는 것은 “부”가 아니라 “이기적인 부”이다. 사도 바울이 돈을 사랑함을 비판하는 것은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물질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적 정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부의 사상은 나의 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부로 연결된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독교는 이기적 부가 아니라 타익적 부를 추구하며, 개인의 부가 아니라 전체의 부를 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신 모범이다(고후 8:9).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지 않다면 우리를 부요하게 하실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부요함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요해지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요하지 않다면 다른 이를 부요하게 할 수가 없고, 우리가 부요함을 나누지 않는다면 다른 이는 부요해지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의 연보와 구제라는 것이 성립된다. 연보와 구제는 재물을 가지는 것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재물을 나누는 것을 전제한다(행 20:34f.; 엡 4:28).


게다가 기독교의 물질관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신론적인 물질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 눅 12:21). 사도 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믿음에서 떠나는 결과를 일으킨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가 물질관에서 문제시 삼는 것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중시하는 생각이다(딤전 6:17). 신앙으로 재물을 다스리지 않고 재물로 신앙을 억누르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재물에 대한 마음을 지도할 것을 심각하게 가르친다.

재물을 앞세우는 것이 문제

진정한 자유는 물질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에 매이지 않고 다스리는 것이며, 진정한 개인주의는 남의 가치를 고양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