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찬미예수
형님이 선물해 주신 팀 캘러의 "탕부 하나님"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사실 이 분의 책이 아닌 다른 어떤 책을 읽다가 Prodigal이란 영 단어에서 힌트와 인사이트를 얻어
메시지를 완성하여 기뻐하며 힘껏 설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바로 이 책이 이미 오래 전에 출간되었던 책이었으며 저자가 팀 캘러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형님이 건네던 책이 한 눈에 확 들어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각색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21세기의 C. S. 루이스"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게 저자 팀 캘러는 누가복음 15장을 바탕으로 한 "탕부 하나님"의 책에서
특유의 지성적 문체로 '탕자의 비유'의 본질적 메시지를 파헤치며, 더없이 복음의 핵심을 짚어 낸다.
그는 우리가 '다 안다' 자부하는 성경 속 친숙한 이야기에 '탕부 하나님'이라는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또한 둘째 아들을 수식하는 형용사 (prodigal son)에 쓰인 단어를 앞뒤 재지 않고 무모할 정도로 자녀에게 다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수식하는데 과감하게 사용한다. 그만큼 이 책의 메시지는 파격적이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굳게 믿는 성실한 기존 신자에게 틀에 박힌 종교의 테두리를 부숴 날것의 복음을 끄집어내며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알리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
1. 아들들을 위해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
'탕자'로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 'prodigal'은 '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며,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다. 이런 아비는 방탕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죄의 책임을 묻거나 응보를 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하나님의 사랑은 둘 다 되찾기 위해 그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이 '사랑을 탕진하는' 아버지 마음 앞에 우리를 멈춰 세운다. 이런 아버지는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는 말 그대로 '탕부 아버지'였던 것이다.
2.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하나님의 '무모한 은혜' 라고 이 책의 저자는 표현한다. 이 깊은 은혜와 사랑을 '탕자' 이야기를 통해 그려내는 책으로서, 신앙의 핵심 중에 핵심이 잘 녹아 있는 저서다. 쉽게 읽히지만 신앙의 정수를 담을 수 있는 것은 저자의 탁월한 역량일 수 있다.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내 삶의 주인이 마치 '나 자신' 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원죄의 핵심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죄'라는 것이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것 그 이상이라는 걸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3. 오늘날도 두 부류가 예수님 주위를 맴돈다.
우리도 '잃어버린 두 아들'처럼 질주한다.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이 책은 '엄격한 종교적 도덕주의자'와 '감각적 쾌락을 쫒는 회의론 자', 둘 다 똑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여긴다. 사실 두 형제의 마음은 똑같이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못마땅해 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둘 다 아버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 했다. 다시 말해서 두 아들 모두 반항했다. 방법상 하나는 아주 못되게 굴었고 또 하나는 지극히 착했을 뿐이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두 아들 중 누구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둘 다 아버지를 이용해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 했을 뿐이지 아버지를 사랑해서 즐거워하고 아버지를 위해 섬긴 게 아니다. 동생은 관습과 인습의 규법을 어긴다. 형은 도덕적 순응을 통해 아버지를 통제하려 한다.
4. 종교적 우등생과 도덕적 비난의 대상은 닮은 꼴
저자는 도덕적, 종교적 우월성에 빠져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형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종교 등 뒤로 숨는다. 그들이 보였던 열심과 도덕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다. 완전한 회개가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기본적인 작동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겉보기엔 충직해 보였던 맏아들도 결국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재물을 원했다고 고백함으로써 둘 사이의 간격을 사정없이 좁힌다. "탕부 하나님"은 종교성에 빠진 형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바라본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노력과 욕심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동생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뉘우치고 아버지가 벌인 잔치의 참뜻을 깨달았다. 형은 마지막까지 자기가 세운 종교적 바벨탑에 갇혀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
저자는 종교적 도덕주의를 특히 치명적인 영혼의 병으로 꼽는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 자아발견의 길을 간 동생과 도덕적 순응의 길을 간 형의 모습은 하등의 차이도 없다. 똑같이 선택한 반항의 길은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죄"를 범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 반항해 그분과 멀어지는 길이 두 가지라는 뜻이다. 하나는 그분의 규율을 어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규율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다. 충격적인 메시지다. 하나님의 율법에 힘써 순종하는 게 오히려 그분께 반항하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열심히 일하고 충성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동기가 무엇인가? 형들은 자신이 착하게 살면 삶이 행복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주실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종교라는 진정제 때문에 사람들은 현실적인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사후의 천국"만 바라는 심리적 위로를 받기 위해 심리적 안정에 머무른다.
5. '진정한 형'이 날 찾으러 이 땅에 오셨다.
우리의 진정한 형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다. 거기서 그분의 옷과 존엄성이 벌거벗겨지셨기에 우리는 자격 없는 존엄성과 신분을 입을 수 있다. 진정한 형이라면 돌아온 동생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형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빚을 갚아 주신 예수님이다. 우리를 찾으러 이 땅에 오신 진정한 형, 예수는 막다른 길에서 우리를 꺼내 '예수'라는 생명 길을 걷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한 나라를 정치적 압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죄와 악과 죽음 자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인류를 본래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다. 그분이 오셔서 겪으신 유랑은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임재로부터 축출되어 우리 대신 영적 소외라는 극한의 절망과 어둠 속에 내던져지셨다. 인류의 반항에 대한 모든 저주와 우주적 실향을 친히 당하셨다. 우리를 진정한 집으로 맞아들이시기 위해서 말이다.
6. 이 세상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여정이다.
우리의 삶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여정이다. 우리는 동생처럼 집을 잃고 영적 유랑자가 되어 방황한다. 유랑의 끝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귀향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에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린다. 예수님은 이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아버지의 잔치는 이미 시작되었다. 잔치를 누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삶을 바꾸라. 구원은 체험적이다. 예수님은 타락한 물질세계도 구속하신다. 예수 복음은 지금, 여기서의 삶부터 바꾼다. 복음을 내면화하고 생활화하라. 잔치는 본질상 공동체적이다. 오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을 시작하라는 감동의 마음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리고 매일같이 예수 복음을 누리며 살며, 종말의 날에 마침내 아버지 집, 영원한 잔치에 참여할 것을 소망하게 한다.
신 목사
'좋은 말씀 > 신권인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항상 기뻐하라(살전5:16-18, 빌4:4-7) (0) | 2017.03.12 |
---|---|
하나님 성품 닮아가기 (0) | 2017.03.10 |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 (0) | 2017.02.24 |
눈물 예찬 (0) | 2017.02.17 |
죽음은 삶이 만든 유일한 최고의 발명품 (0) | 2017.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