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 종일 최근에 했던 구원론 설교와 관련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먼저는 3명의 친구 목사님들과 내 설교를 읽고 비평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 후에는 구원론 설교를 읽고 공감하는 바가 많다며 대화하고 싶다는 목사님과 만나
저녁 7시가 넘도록 열띤 이야기꽃을 피웠다.
친구 목사님들은 하나 같이 내 설교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어느 한쪽에 발을 담그지 않고 칼뱅과 아르미니우스를 다 비판하는 양비론은
자칫 성도들을 혼돈에 빠뜨릴 위험이 있으며,
양비론을 말하는 설교는 확신이 부족한 설교가 될 수밖에 없고,
확신이 부족한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고 비평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양립을 강조한 것에 대해서도 염려를 표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그렇잖아도 부패한 의지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며 이것은 자유의지의 고삐를 풀어주는 것이고,
성도들이 자기 멋대로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심히 염려했다.
나는 친구 목사님들의 비평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한다.
솔직히 양비론보다는 어느 한쪽에 발을 담그는 것이
신앙적인 확신과 안정감을 얻는데 훨씬 유익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 유익에도 불구하고 동의할 수는 없었다.
본시 성경의 세계와 하나님의 통치 세계는 인간의 논리로 해명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며,
인간의 논리적 체계와는 어긋나는 변증법적 긴장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발을 담그지 않는 것이 성경적 진리에 부합하는 태도라고 강변했다.
확신이라는 것 또한 신앙의 필수 요소요 설교의 필수 요소임을 인정한다.
확신이 없는 신앙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이라는 것은 양날의 칼처럼 매우 위험한 물건이다.
역사를 보라. 신앙적 확신이 종교적 폭력으로 이어진 경우가 숱하게 많았지 않은가.
가장 잔인한 전쟁은 언제나 종교 전쟁이었지 않은가.
또 신앙적 인식이 좁을수록 확신의 강도가 높고,
확신의 강도가 높을수록 자기 확신 속에 갇힌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진실이지 않은가.
하여, 나는 신앙적 확신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자기 확신을 겸허하게 돌아보고
신앙적 인식의 지평을 넓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목사의 책임이라고 강변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양립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염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부패한 의지를 제어할 수 없다며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다스리심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물론 나의 구원론 설교가 전적으로 옳다는 확신으로 이렇게 강변하고 반박한 건 아니다.
설교에서도 말했다시피 세상의 어떤 신학이나 설교도 결코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인 구원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인지하고 수정하려는 지적 정직함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
더 깊은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와 노력의 끈을 놓지는 말아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론 설교를 하는 것도 그런 용기와 노력의 일환이라고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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