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오늘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생각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여기 신령한 젖은 베드로 전서 1장 마지막 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배가 고플 때에 젖을 달라고 우는 것 같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성경에 대하여 몇 가지로 생각하기로 합시다. 먼저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실을 몇 가지 말하려 합니다.
첫째로, 이 성경은 세계의 어떤 다른 책보다도 제일 많은 방언으로 번역된 책입니다. 지금까지 번역된 방언 수가 1077방언이올시다. 그 가운데 약 700방언은 본래 분자가 없는 야만인의 방언인데 선교사들이 문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위해 번역을 했습니다. 지금은 세계 인구의 약90% 되는 모든 사람은 자기의 말로써 성경을 읽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공회라는 단체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공헌을 한 것을 압니다.
그 다음으로 성경은 제일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통계를 보면 우리 한국 안에서도 1952년도에 성경을 팔기도 하고 그저 배부도 해준 전서 혹은 쪽 복음을 다 합해서 94만 9748권이나 나갔다고 합니다. 근 백만 권입니다. 1953년 통계를 보면 77만 5664권이 나갔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어떤 한 책이 이만큼 보급된 것은 없습니다. 또 전 세계 통계로 보면, 세계 각국의 성서공회의 통계를 보면 1953년에 나간 책 수가 2417만 5243권이나 된다고 합니다. 근 2천 5백만 부가 세계에 나갔다고 합니다. 어떤 책 하나가 이렇게 많이 세계에 보급된 것은 없는 줄 압니다.
그 다음에는 자연히 성경은 제일 많이 읽는 책입니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동서양을 물론하고, 각계각층의 사람이 성경을 읽습니다. 목사나 신학자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정치가나 과학자나 교육가도 읽고, 문학가도 읽고 예술가도 읽고,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든지 다 읽습니다.
여러분 혹 기억하시는지 모르지만, 몇 해 전에 독일의 나치 범죄자들이 마지막에 사형 받기 며칠 전에 무슨 책을 읽겠느냐 할 때 구 사람 외에는 모두 성경을 읽게 해 달라고 해서 마지막에 성경을 읽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관계로 이 성경은 어떤 책보다도 제일 영향을 많이 주는 책입니다. 종교와 도덕과 철학 방면에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경제와 과학과 음악과 문화와 모든 방면에서 성경은 어느 한 책보다도 제일 많은 영향과 감화를 준 책입니다.
우리가 영국 문학을 공부하려면 흔히 두 권의 책을 공부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경이요, 하나는 셰익스피어라고 합니다. 독일 문학을 공부하는 데도 두 권의 책을 공부해야 된다고 합니다. 하나는 독일 말 성경이요, 하나는 괴테의「파우스트」라고 합니다. 이태리 문학도 역시 이태리의 성경과 단테의 저서라고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건축이나 음악이나 어떤 문화 방면일지라도 가장 위대한 이름을 남기고 간 사람 치고 누구 성경의 감화를 받지 않은 사람 없습니다. 사실 지금은 성경을 모르면 신, 물신을 막론하고 무식한 사람입니다. 문화인이 아닙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입니다. 현대 문화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면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성경은 어찌하여 이렇게 널리 읽는 복음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요한복음 5장 39절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 가운데는 다른 책에서 발견할 수 없는 영생의 진리가 있습니다. 이 성경 가운데는 다른 데서 만날 수는 없는 참 생명이 되시고 부활이 되시는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고, 이렇게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성경을 계속해 읽습니까? 이 성경은 문자 그대로 생명의 양식이올시다. 신령한 젖이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데 그 말씀이 성경 가운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고, 성경은 사람에게 있어서 신앙의 최고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바로 믿게 되느냐 하는 표준이 여기 있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여야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그 표준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여러 가지 상징으로써 말한 것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내 발 앞에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두운 밤길에 걸어가는 사람에게 빛이 필요한 것처럼 어두운 세상을 걸어가는 인생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5장 14절에 성경은「태우는 불」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람 가운데 있는 모든 죄악을 태워서 없이 하는 능력이 이 책 가운데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을 보면 성경을「방망이」에 비유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망이와 같이 모든 불의와 죄악을 타파하는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4장 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신혼골수를 쪼개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을 들어내고 그 죄악을 깨끗이 하는 세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종자」에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종자가 비록 작지마는 그 가운데 생명이 있는 까닭으로 우리가 종자를 밭에 뿌리면 그 씨가 얼마 있다가는 싹이 나고 점점 자라서 마지막에 열매를 맺고야 그만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작은 진리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에 떨어지면 점점 자라서 마지막에 생명의 열매를 맺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은 과연 천성을 향하여 가는 사람의 노정기(路程記)가 되고, 풍파가 높은 고해를 지나가는 항해 자들의 지남침(指南針)이 되며,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등불이 되며, 쓸쓸하고 냉냉(冷冷)한 세상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던져주는 사랑의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책을 자유로 살 수 있고, 자유로 읽을 수 있고, 자유로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역사를 잠깐이라도 생각하여 본다면, 과거에 있어서의 이와 같이 못한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물론 성경이 보급되지 못하여서 대체로 15세기까지는 큰 교회라고 해야 성경이 한두 권 있을까 할 정도입니다. 개인으로 보면 왕가이든지 귀족이든지, 특별히 부자가 아니면 성경 소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콘스탄틴 같은 그렇게 세력 많은 황제라도 성경을 겨우 50권 양피(羊皮)로 매고 거기 베껴서 만들어 유명한 교회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는 사람은 수백 리를 걸어가서야 성경 읽는 말씀을 친히 들었다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중고 시대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암흑 시대를 지나올 때 천주교회에서 모든 평신도에게는 성경 읽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리해서 평신도라도 성경을 읽고 성경을 그대로 믿고자 하던 왈더라고 하는 사람을 따르는 월데시안 교파들과 교인들은 성경 읽기를 애쓰고 몰래 베껴 가지고 다니다가 붙잡혀서 많은 고생을 당하고 핍박을 당한 사실을 교회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16세기까지도 영국 같은 나라에서 윌리암 킨델리 같은 사람이 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고 그것이 죄가 되어 그 때에 영국 왕 헨리 8세에게 붙들려서 화형을 당하는 순교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536년입니다. 이런 시대가 있지 아니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생각할 때 그렇지마는, 역사를 소급할 필요도 없지요.
오늘날 문명했다는 20세기를 생각해 보세요, 38 이북에 있는 북한의 형편을 생각해 보세요. 중공을 생각해 보세요. 소련과 여러 위성국가를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믿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유로 매매할 수도 없습니다. 자유로 출판할 수도 없고, 이렇게 자유로 모여서 성경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공부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배울 마음이 있고 성경을 연구할 마음이 있어도, 어떻게 성경 한 권을 가지고 있으면 아마 남모르게 골방에 불을 켜고 성경을 읽는 형편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 남한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어서 성경을 자유로 판매할 수 있고 돈 몇 푼 안 주고 살 수 있고 마음대로 공부하기 위해서 모일 수 있는데 어찌하여 남한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 공부를 게을리 합니까?
여러분,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내가 성경 공부를 게을리 했는가, 부지런히 했는가?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집에서 아이를 하나 기르는데 이 아이에게 그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밥 많이 먹어라 밥 많이 먹어라 늘 권한단 말이에요. 흔히 어머니가 집에서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까? 늘 어머니가 권하니까 이 아이는 밥 많이 먹는 것이 어머니에게 무슨 좋은 일을 하는 줄로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머니가 한 번 싫은 이야기를 하니까 그 아이 하는 말이 그럼 밥을 안 먹겠다고 하더랍니다. 아마 남한에 있는 어떤 교우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성경공부 하라 공부하라, 이렇게 목사들도 권면하고 장로들도 권면하니까 성경공부 하면 목사에게 유익이 있는 줄로 생각하는 모양이란 말이에요. 성경 공부하라고 권하는 것은 목사 자신을 위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말입니다. 우리가 어느 시대에 성경을 공부하지 아니 하리요 마는, 특히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회를 주실 때에 성경 공부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우리 한국 교회의 사명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남한에 있는 믿는 사람에게 우선 우리 민족을 구원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아시아 십억의 영혼을 구원하라는 큰 사명을 우리에게 맡겼는데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면 먼저 우리 믿는 사람이 성경을 몰라 가지고 이 사명을 감당하겠습니까?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 어느 선교 지보다도 먼저 부흥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물론 한국 교회가 30년, 40년 전에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에는 저도 잘 기억하지마는 정식 예배를 아침에 보지 않고 아침에 다 모여서는 먼저 한 시간 반이나 한 시간 성경 공부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정식 예배는 오후 예배라고 하여 두 시에나 모여서 예배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정식 예배를 이렇게 아침에 보니까, 그저 아침에 이렇게 예배 보면 그만인 줄 알고 공부 예배에 참예 하라고 하지만 들어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전에도 사경회를 열심히 잘했습니다. 지금도 사경회를 하지만 사경 회에 나오는 사람도 적고 또 사경 회 하는 방법이 변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거보다 이야기회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나 잘해야 그저 이야기를 들으려 가겠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잘 못하는 목사가 사경 회를 하면 오지도 않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지금은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좁아져서 우리 한국이 온 세계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이렇게 온 세계 사람들과 접촉함에 따라서 여러 가지 복잡한 사상과 이단적인 종파도 점점 한국 안에 많이 들어옵니다. 이런 작은 종파들과 딴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흔히 무엇을 빙자하는고 하니 우리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이렇게 가르친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증인들이란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해 보세요. 성경을 가지고 꾀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에 왜 꾀이냐 하면 본래 믿기를 믿고 수십 년 예배당에 다니기는 하지마는 성경을 공부 안 했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성경 아무 장 아무 절에 말이 있고 아무 장 아무 절에 무슨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아니하냐 하면 입을 딱 벌리고 할 말이 있어야지요. 모은단 말이에요.
내 신앙을 바로 유지하기 위하여. 진리를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성경을 조직적으로 연구해서 체계 있는 신앙의 지식을 가지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을 공부하라고 권합니다. 또 우리가 자연히 은혜 받는 사람이 되려면 혼자만 믿지 아니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때에 가르쳐야겠고 권면할 수 있을 때에 권면도 해야 되겠고 전파를 할 수 있을 때에 전파도 해야겠는데 이런 것을 하려고 하면 내가 성경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없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믿기를 오래 믿었지만 벙어리 교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야 되겠습니다.
금년 새해 셋째 주일인데 새해부터 특별히 권면하는 것은, 또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제부터 전에 베레아 사람 같이 성경을 연구하는 교인이 되고 성경을 힘써 공부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우선 여기 앉은 여러분은 아침마다 성경을 한 장 읽고 기도하고 다른 일을 시작하세요. 나의 중국 친구 가운데 리리암 왕이라고 하는 목사는 무슨 결심을 하였나 하면 성경 읽기 전에는 조반 안 먹기로 결심했습니다. 성경 읽기 전에는 절대로 조반을 안 먹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할 수 있으면 그런 작정을 해보세요. 조반 몇 끼 안 먹으면 아마 성경 읽게 될 거예요. 또 할 수 있으면 성경 통신과 공부를 할 수 있는데, 종교 교육부를 통해서 할 수 있고 또 부흥협회를 통해서도 할 수 있는 성경 통신과를 집에서 공부해서 계통적으로 연구하세요.
또 할 수 있으면 시간 좀 내서 겨울 같은 때 몇 달 동안 친히 가서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공부를 못하지만 우리가 주일날 예배하려 예배당에 왔다가야 이미 온 김에 한 시간 더 성경 공부 못할 것 어디 있어요.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렇게 정식 예배에만 참석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 시간씩 더 공부하고 매주일 성경을 계통적으로 공부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은혜를 받아서 내가 반드시 다른 사람의 억으로 예수 믿는 사람되지 말고 내가 아는 그 지식으로써 믿음에 덕과 지식을 더한 그런 신앙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받는 사람되기를 바랍니다. (1955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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