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임이요.』(마 5:4)
예수께서 갈릴리 전도를 시작하실 때에 고향 나사렛에 오셨습니다. 그 때에 회당(會堂)을 맡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드리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찾아서 읽으시고 오늘 이 말씀이 응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이사야 61장 1절과 3절에 있는 대로 먼저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喜樂)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메시야가 오시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시고 마음 상한 자를 고쳐 주시며 포로 된 자와 갇힌 자를 해방하여 주시고 모든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시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메시야가 오셔서 갈릴리 산상에 섰을 때에 다시 불쌍한 대중을 향해서 가르치신 말씀 가운데 한 절은『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임이요.』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이 세상 가운데 오신 목적 중의 하나는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려 오신 것입니다. 인간 생활에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오는 애통과 비애(悲哀)가 있습니다.
첫째로 죄로 말미암아 오는 애통(哀痛)이 있습니다.
시편 51편을 읽으면 여기에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이 있습니다.『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를 도말(塗抹)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이 말씀은 다윗이 죄를 지은 후에 말할 수 없는 애통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은 음성이올시다.
마태복음 26장 마지막을 읽으면 거기에 이런 두 기사가 있습니다.『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곧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사도 베드로가 본의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한 후에 그 죄를 깨닫고 깊은 밤 밖에 나가서 심히 애통하며 통곡한 기록이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떤 집회에 가서 집회를 마치고 났을 때에 어떤 젊은 여자가 와서 조용히 만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슨 사정인지 물어 보았더니 이 여자가 하는 말이, 자기 남편은 오래 전에 군대에 나가서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데 그만 어떤 좋지 못한 남자에게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지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죄를 자복 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죄를 애통히 회개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애통하는 자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온 민족의 죄를 대속하는 대 속죄의 날이 있는 것이올시다. 그 날 대제사장은 흠 없는 두 산양을 택해서 한 산양 위에 모든 민족의 죄를 고하여 그 죄를 산양의 머리 위에 짊어지운 후에 그 산양을 잡아서 피를 흘려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려 죄를 속량(贖亮) 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신앙 위에 역시 전 민족의 죄를 다 고하며 그 죄를 위임한 후에는 그 산양을 저 먼 곳 광야로 내어보냈습니다. 이 산양을 흔히 아사벨 산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는 이 두 가지 양의 임무를 한 몸에 하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그 몸을 십자가에 드려서 만민의 죄를 대속 하실 뿐더러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죄를 용서하여 주셔서 죄를 지고 먼 곳으로 가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하늘이 땅에서 먼 것 같이, 죄를 애통히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사죄의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과거에 어떠한 허물이 있든지, 온전히 애통히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죄 때문에 그냥 애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것 때문에 번민과 고통을 계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우리의 영혼은 죄를 벗었습니다. 기뻐 뛰며 주를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읽은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우리 주님은 화관으로 재를 대신하시고,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시고,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인간 생활에는 때때로 누구나 경험하는 대로 빈궁과 고독의 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을 읽으면 거기 사라의 여종 하갈이 그만 사라의 미움을 받아서 그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정처 없이 물 한 병과 마른 떡 몇 조각을 들고 먼 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브엘세바 근방에 오고 보니 물은 다 없어졌는데 샘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떡도 다 떨어져서 어디서 구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고 어린 이스마엘은 그만 기진맥진해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하갈이 그 광경을 보고, 『내가 어찌 내 아들이 목말라 죽는 것을 볼 수가 있으랴』부르짖으면서 성경에 있는 대로 방성대곡하였습니다. 여기 빈궁과 고독의 애통이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하갈을 도와준 얘기가 계속해 있습니다.
열왕기 상 17장을 읽으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미움을 받아서 멀리 시돈에서 손 노릇할 때 사르밧이라고 하는 동네의 입구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어떤 여자가 나와서 나무를 줍는데 시장한 엘리야가 하는 말이 물을 좀 주어서 나로 하여금 마시게 하고 떡 한 조각을 주어서 나의 시장을 좀 멈추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가 나무를 줍다가 돌아서서 하는 말이『우리 집에는 가루 한 통밖에 없고 병에는 기름이 조금 밖에 없는데 지금 내가 나무를 주어다가 그 한 통 밖에 없는 가루와 그 기름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은 후에는 나와 내 아들이 한 가지로 죽으려고 합니다.』여기에 역시 빈궁과 고독의 애통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 여자를 도와준 기사가 또 계속해서 있습니다. 제 아버님이 저에게 늘 말씀하신 것 가운데 하나는 모든 설움 가운데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너는 언제든지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라』고 하셨습니다.
해방 후 38선을 넘어 보고 6·25때에 사방으로 흩어져서 생명을 아껴보려고 허둥대다가 1·4후퇴 때에는 전 남한에 방황하고 이 곳까지 살아온 이 빈궁과 고독의 애통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다 체험하여 보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날은 점점 기울어 어두워 오는데 어디 가야 하룻밤을 지낼지 알 수 없어서 산기슭 혹은 길가에 방황하던 분도 우리 가운데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어떤 날은 이미 아침이 지나고 점심 때가 가까웠지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헤매어 본 이도 우리 가운데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은 빈궁과 고통의 경험을 당할 때에 빈궁과 고통을 애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은 이런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위로가 또한 있고 이런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도움이 또한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간증하지 않을 수 없을 줄 압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장로님 부인이 얼마 전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마 우리 교우들도 들은 이가 많이 계신 줄 압니다. 1·4후퇴 때에 수다한 가족을 데리고 부산에 내려갔습니다. 여러분이 다 내려가신 것과 같이 부산으로 내려가서 있을 데가 없어서 어떤 예배당 지하실에 있게 되었는데 마루도 깔지 않은 시멘트 바닥이올시다.
시멘트 바닥인데 아무래도 가마니를 몇 장 사다가 깔고야 자겠는데 거기 다 내려가고 보니 가족은 많은데 수중에 동은 3천 원 밖에 없습니다. 자, 이걸 가지고 가마니를 사다 깔면 내일 아침 조반 사 먹을 돈이 없겠고 조반을 사 먹자면 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잘 수밖에 없고,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장로님과 두 분이 많이 걱정을 하다가『아무래도 찬 시멘트 바닥에서 자다가는 얼어죽겠으니 오늘 저녁부터 살아야 되겠으니 아무래도 가마니를 사옵시다.』이렇게 의논이 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장로님이 어두운 데서 가마니를 파는 데가 있는지 허둥지둥하면서 그 복잡한 부산 거리에 다니다가 마침 우연히 어떤 구석에서 노인이 가마니 석 장을 지고 가는 것을 만났습니다. 그래서『가마니 팔지 않겠습니까? 그 가마니 꼭 필요한데 파십시오』그래 그 노인이 하는 말이『아니요, 우리도 살려고 사갑니다.』『우리는 서울서 온 피난민인데 오늘 저녁 가마니가 있어야만 시멘트 바닥에서 자겠는데 정 급하지 않으면 그 가마니를 우리에게 파십시오』그러니까 그 노인이 이 사정을 듣더니『그래요? 정 그러면 팔지요.』그래서 그 가마니를 사왔다고 합니다.
가마니를 사다가『자, 이젠 그 가마니를 뜯어서 깝시다』하고 뜯는데 천만 뜻밖에 그 가마니 속에서 돈이 8만 3천 원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양심적인 장로님은 돈이 가마니에서 나오자 남의 돈이므로 이걸 꼭 갖다 주긴 주어야 되겠는데 이걸 어느 상점에서 산 것도 아니고 어느 노인에게서 샀는데 이걸 갖다 줄래야 갖다 줄 제가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엘리야가 시장할 때 까마귀를 시켜서 떡을 물어다 먹였다고 하는데 이건 아마 우리 가족을 굶어 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가마니 속에 돈까지 보냈나 보다 하고 그 돈으로 수다한 가족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았다 합니다.
여러분의 경험이 다 이와 같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찬송가에 있는 대로『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든지 아무리 빈곤한 일, 아무리 고독한 일, 아무러한 애통을 만날 때에도 그 가운데 하늘의 은혜가 있고, 주님의 능력이 같이 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슬픈 자에게 위로를 주시고 슬픈 자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빈궁과 고통으로 애통하는 자를 돕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에 비로소 위로와 능력이 있게 되었고, 어려서 부모 없는 고아를 보육하는 여러 고아원도 주님께서 오심으로 이 세상에 생기게 되었고, 병난 자를 치료하여 주는 병원도 주님께서 오심으로 이 세상에 비로소 있게 되었고, 남편을 잃은 과부들과 어린아이를 보호하여 주는 모자원 같은 자선 기관도 주님께서 오심으로 이 세상에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님께서 오신 이 거룩한 목적을 언제나 잊지 말고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또한 셋째로는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가려고 하면 종종 이별의 슬픔이 있습니다.
특별히 죽음으로 이별하는 사별(死別)의 애통이 있습니다. 창세기 35장을 일거 보면 야곱이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던 아내 라헬에게서 귀한 옥동자 베냐민을 얻었습니다. 옥동자를 낳은 것은 기쁘지만 불행하게 라헬이 그 아기를 낳자마자 기운이 지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외로이 야곱은 그 시체를 무덤에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의 애통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을 읽어보면, 엘리사에게 어떤 젊은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선생님, 아시다시피 내 남편은 선지자의 성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진실히 공경하고 모든 일을 정직히 한 일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남편이 불행히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빚이 좀 있는데 이 빚을 지운 채주(債主)가 이 빚 대신에 어린아이 둘을 종으로 대려 가겠다고 하니 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호소했습니다. 여기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의 설움과 비통(悲痛)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한 번은 나인성 가까이 들어갔습니다. 나인 성으로부터 한 장례 행렬이 마주 옵니다. 들으니 그 장례는 젊은 소년의 장례올시다. 그 뒤에는 어머니가 울면서 따라오는데 그는 과부의 외아들이라 합니다. 여기에 외아들을 잃은 슬픔이 있습니다.
오늘날 여기 앉은 여러분 가운데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분도 계시고,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분도 계시고,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잃은 어머니와 아버지도 계십니다. 얼마 전에 바로 이 예배당 앞에서 부산에서 올라오신 어떤 자매님을 만나 안부를 묻고 그의 아들이 몸이 편치 않아서 누웠던 그 사실을 얼른 기억해서 그 병중에 있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자매 님은 눈물로 대답했습니다. 그만 그 아들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외아들이올시다.
6·25五 이후에 우리가 당한 모든 체험, 우리가 흘린 모든 눈물을 다 모아 놓으면 오히려 한강수가 부족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느낌이 있을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 떠나는 슬픔, 사별의 애통의 눈물을 흘려 보지 않은 이가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없는 줄 압니다. 이와 같은 사별의 애통의 눈물을 흘리는 이에게 예수 님께서 주려는 위로가 무엇입니까? 먼저 성경에 기록한 대로, 예수 님께서는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울 때에 같이 눈물을 흘리며 우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오빠 되는 나사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예수 님께서 와서 보니 마리아도 울고 마르다 도 울고 다른 여인들도 웁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내가 슬퍼할 때 어떤 가까운 친구 한 사람이 와서 한 가지로 눈물을 흘려주면 내 슬픔이 절반이나 감해집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에도 기록한 대로, 우는 자와 같이 울 때에 내 슬픔이 절반이나 감해지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 님께서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에 같이 눈물을 흘리시면 우리의 위로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언제나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은,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캄캄한 밤 남모르게 잠을 자지 못하고 홀로 눈물이 베개를 적실 때에도 홀로 우는 줄 생각하지 마세요. 같이 우는 다른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사정을 아시고 여러분의 아픔을 아시고 한 가지로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들의 곁에 계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홀로 눈물 흘릴 때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같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동정하시는 주님이올시다. 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을 뿐더러 무덤에 가서 나사로를 다시 실리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가 몇 군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지만 장례식을 주례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언제나 장례식을 만나면 부활의 아침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몇 사람을 육신으로 살리는 것이 목적이 아입니다. 기적을 통해서『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주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 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부활의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에 같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동정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와 같이 하늘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 이 무거운 육신을 벗고 천사와 같이 하는 나라에 갈 때에 기쁨으로 주를 맞고 기쁨으로 먼저 간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얼마 전에 망우리(忘憂里)에 가서 장례식을 하면서 하관을 하고 성분을 하는데 물론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관 할 때도 찬송을 부르고 특별히 묻을 때에도 둘러서서『저 높은 곳을 향하여』찬송을 계속해서 여러분이 불렀습니다. 그 때 바로 거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다른 장례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역시 무덤을 묻는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아이고 아이고』하는 곡성뿐입니다. 한 편에는『저 높은 곳을 향하여』하는 찬송이 계속되는데 한 편에는 통곡이 계속합니다. 여기에 예수를 아는 사람의 장례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장례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별을 통하여 오는 모든 애통의 눈물을 씻어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영어에는 위로하는 말을「comfort」라고 합니다. 본래 라틴어에서 온 말인데 그 뜻은 무슨 뜻인고 하니 능력으로 같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같이 하신다는 말입니다.「comfort」라면 힘이라는 말입니다. 능력을 같이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가 난관을 당할 때, 빈궁으로 울 때에 우리에게 능력으로 같이 해서 모든 애통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부르짖기를『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둘째는 예수 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방법은 요한 복음 14장 27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나의 주는 평안은 세상 사람이 주는 평안과 같이 아니하니 그러므로 너희는 부러워하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라』하는 것입니다.
우선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능력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주님의 평화, 주님의 마음속에 있는 평안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십니다.『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산 가운데 하나는 마음의 평안이올시다. 그러므로 주를 영접하는 사람은 어떤 대를 당하든지 어떤 환경을 당하든지 그 마음속에 평화가 같이 하실 것입니다.
과연 이사야 53장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는 우리의 슬픔도 담당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수고하고 슬픔의 무거운 짐을 지는 사람들은 다 주님께로 나오세요. 주님께서 편히 쉬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과연 우리 주님께서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여 화관을 주어 재를 대신하고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고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하십니다.
(1955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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