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로 나타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고후2:14)
이 말씀은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지식을 나타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은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한 것을 감사한다고 기록했고, 15절에는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다고 하는 그런 말씀으로 기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곧 향기이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사람도 곧 그리스도의 향기하고, 이와 같이 가르쳤습니다.
옛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멀리 레바논에 가서 백향목(柏香木)을 찍어다가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백양목이란 나무가 나무만 좋을뿐더러 좋은 향기가 나기 때문입니다. 전에 모세가 성막(聖幕)을 지은 다음에도 그러했고, 지은 다음에는 향단이 있습니다. 그 향단은 아름다운 금으로 싼 그런 단인데 언제든지 제사장들이 그 위에 분형을 해서 향기로운 향연으로 성전을 가득 차게 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옛날 콘스탄틴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 성 소피아라는 유명한 예배당을 지을 때 밖에는 물론 돌로 지었지만 안에 회를 바를 때 회산 물에 향품(香品)을 섞어서 언제든지 그 교회 안에 들어가면 향기로써 그 예배당이 가득 차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멀리 와서 아기 예수 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 귀한 예물 세 가지를 드렸는데 하나는 황금, 둘째는 유향(乳香), 셋째는 몰약(沒藥)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유향, 몰약은 향기를 내게 하는 향품입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와 나사로가 예수님에게 잔치를 베풀고 대접할 때에 마리아가 좋은 옥합(玉盒)을 깨뜨려서 그 향기로운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으니 향기가 온 방에 가득 찼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레 중 첫 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와 살로메와 다른 여자들이 일찍이 예수 님의 무덤을 찾아갈 때에 예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준비해 가지고 찾아갔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그 향품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갈 때에 향품을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향기를 거룩한 것, 깨끗한 것, 사랑, 의로움, 충성과 정성과 믿음의 상징으로서 생각되어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기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향기는 인간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상쾌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선명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고 즐겁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들어간 심령은 성결한 심령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그 사람의 입술은 성결하여집니다. 입술 뿐 아니고 그의 전 생활이 정화되고 미화되고 사랑으로 화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에 그 가정이 깨끗해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떤 사회에 들어갈 때에 그 사회가 깨끗해집니다.
향기는 끄는 힘이 있습니다. 인력이 있습니다. 봄 동산에 아름다운 꽃이 필 때에 나비들이 사방에서 모여 옵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보기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름다운 꽃 속에 향기가 있어서 그 아름다운 꽃에서 향기를 방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리스도의복음에는 인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 인력에 끌려들어왔던 것입니다. 야고보도 그러했고, 요한 도 그러했고, 모든 제자들이 다 그러했고, 오순절에 회개한 五천 명도 그러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인력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남녀의 구별이 없고, 노소의 차가 없고, 빈부나 귀천에 조금도 편벽이 없고, 교육을 받았거나 못 받았거나 문명의 분간도 없고, 지위의 분간도 없이, 각계각층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인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향기에 도취되며,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그의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황제도 그러했고 정치가, 철학자, 과학자도 그러했고, 옛날도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향기는 끄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이 내게로 이끌리겠노라』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는 향기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이끕니다.
그러나 향기는 이끌기도 하고 물리치기도 합니다. 벌과 나비 같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봉접(蜂蝶)은 향기가 이끌지만, 어떤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향기가 물리칩니다. 향을 피우면 모기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향기가 모기를 물리칩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를 볼지라도 그리스도 복음의 향기가 나타날 때에 많은 사람이 향기로 말미암아 이끌려 오는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는 물리치는 그런 힘이 있어서 오리려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죄를 더 짓고 짓다가 마지막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여기 16절에,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게 되는 냄새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되는 냄새가 된다는 말은 그 말입니다.
복음의 향기가 세상에 올 때 빛은 사랑하는 사람,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사람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나아옵니다. 그러나 어두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좋아하고 불결한 것을 좋아하는 이와 같은 사람은 오리려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더 죄를 짓고 더 교회를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핍박합니다. 이런 사람은 옛날도 있었고 오늘날도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향기는 끄는 힘이 있는 동시에 사람을 분별하고 심판하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두 파로 나누는 힘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동경해서 나오는 사람과 더러운 것을 찾아 그리고 나가고 오히려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이 두 가지 종류로 나누고 맙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화의 힘, 끄는 인력, 또는 선과 악을 분별해서 심판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한 거름 더 아나가서『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조금 생각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향기입니다. 우리가 복음 속에 들어와서 향기에 온전히 흡수되는 바가 될 것이면 우리 자체가 향품이 되어서 향기를 방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빛은 예수 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습니다. 우리는 빛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역시 작은 등불입니다.
여름날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 망울은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이슬방울이 아침에 솟아오는 광선을 받을 대에 비록 작은 이슬방울이지만 아침해의 모든 영광을 우리에게 반사해 줍니다. 우리가 비록 죄 가운데서 나고 죄 가운데서 자라서 더러워지고 흠 많은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고 그리스도의 향기로써 아니 그리스도로써 우리 온 몸과 마음이 다 화하게 된다 할 것이면, 이 부족하고 더럽고 연약한 몸이 변화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능히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른도 그러하고 아이도 그러하고 남학생도 그러하고 여학생도 그러합니다. 여기 하나님 앞에서 향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릴 때에 희생의 제물을 번제단(燔祭壇) 위에 놓고 불을 살랐습니다. 불을 사르는 까닥은 희생의 제물이 불을 살라서 그 불사르는 번제 향연이 높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구약을 보면 노아가 홍수 이후에 짐승을 잡아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번제의 향연을 흠향(歆饗)하시고 다시는 인류를 홍수로 벌하지 아니하시고 축복하시겠다고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번제의 향연을 하나님께서 흠향하셨습니다.
우리 신약에 와서는 이것이 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흠 없는 몸으로서 단번에 우리 모든 만민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 향연이 하나님 보좌에 상달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 번제의 희생을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피를 흘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단순히 믿음으로써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제 몸으로써 산 제사를 드리라고 신약은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말은 무슨 알인가 하면, 우리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 앞에 이 예배, 우리의 찬송, 기도, 우리가 헌금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이 모든 예배 자체가 향기와 같이 하나님 보좌에 상달하고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흠향 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요한 이 어떤 천사가 큰 대접에다 향을 가득히 담은 것을 하나님 보좌에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 이 천사에게 묻기를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니 그것은 땅에서 드리는 성도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드리는 기도가 참된 기도면 향기로써 하나님 보좌에 올라갈 것입니다. 찬송도 그리하고, 헌금도 그리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도 그러하고, 모든 예배 순서가 그러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예배 시간이 얼마나 거룩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깨끗해야 하고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신성해야 할는지 다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배 시간만 아닙니다.『너희는 몸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마음과 몸 전체가 그리스도화해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 것을 생각할 때에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가 없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깨끗케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조심하여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활 전체가 하나님이 흠향할 수 있는 향기가 되라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향기가 된 사람은 자연히 사람 앞에서도 향기가 되겠습니다. 향기는 보이지 않지만 사방에 퍼집니다.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화하여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될 때에 그 사람이 있는 주위는 향기로써 자연히 방사되겠습니다. 무언중에 감화가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가정에 들어갈 때에 가정이 깨끗해지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관청에 들어갈 때에 사방 네 면에 앉은 다른 직원에게 무언의 감화가 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군대에 있을 때에 같이 있는 군인에게 무언의 감화가 되겠습니다.
아가서를 보면 거기에 상징적으로 우리 믿는 사람을『사론의 장미』라고 말했습니다 장미가 꽃도 아름답지만, 특히 장미를 다 귀엽게 생각하는 것은 꽃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향기가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은 책의 어떤 곳에는 우리 믿는 사람을『산 곡간의 백합화』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때는『가시덤불 가운데 백합화』라고 말했습니다. 백합화가 꽃도 아름답지만 백합화에서 방사되는 향기가 지극히 아름답습니다. 또 아름다운 꽃에는 향기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만일 겉으로는 꽃과 같지만 향기가 없으면 그것은 참 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사람이 만든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산 꽃에 향기가 있습니다. 보기에는 꽃 같지만 향기가 없으면 그것은 죽은 꽃인지 모르겠습니다. 참꽃, 산 꽃, 생화에는 반드시 향기가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믿는 사람 같지만 왜 향기가 없습니까? 겉으로는 믿는 것 같지만 향기가 없다고 할 것이면 그 믿음은 거짓된 믿음이든지 죽은 믿음이올시다.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를 내 주로 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서 내 죄를 다 자복하고 용서함을 받고 거듭 나서 새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다고 하면 이 꽃은 아무리 가시덤불, 험악한 골짜기 같은 그런 음침한 곳에서도 반드시 향기를 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땅을 삼천리 강산, 금수강산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사는 온 땅을 동산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라 동산에는 꽃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동산이 어떠합니까? 향기의 반대되는 냄새를 취기라고 합니다. 더러운 냄새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 동산에 얼마나 악취가 많습니까? 냄새나는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군대에는 악취가 없습니까? 관청에는 악취가 없습니까? 학교에는 없습니까? 이 아름다운 동산을 향기로 가득 채울 이가 누굽니까? 그리스도의 향기 되는 여기 앉은 여러분이 아닙니까? (1955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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