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권혁승교수

신앙의 수직적 상승과 수평적 전진 (사 40:31)

새벽지기1 2017. 1. 21. 18:33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 40:31)

 

'믿음‘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표현된다. 대표적인 것은 ’하나님 사랑‘이다. 부활하신 주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세 번이나 거듭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요 21:15-17)이나 에베소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신 것(계 2:4)은 모두가 믿음에 관한 질문이며 책망이다. 믿음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 앙망‘이다.

 

‘앙망’은 히브리어로 ‘카바’인데, ‘기다림’(wait upon)을 의미한다.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최고의 우선순위를 둔 전적인 신뢰의 기다림이다. 그래서 ‘앙망’은 ‘희망’(hope)이란 단어와 맞바꿀 수 있다. ‘희망’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티크바’는 ‘선’(line)을 의미하는 ‘카브’와 어원이 같다. 히브리어로 ‘희망’은 ’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선‘은 점과 점을 이어놓은 것이다. 점은 홀로 존재하는 파편인데, 그런 점이 다른 점과 만나서 한 방향의 선이 된다. 선은 방향과 지향점을 갖고 있기에 희망이 될 수 있다. 의미 없는 점과 같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거룩한 방향성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과 연결된 거룩한 ’선‘을 타고 ’희망‘을 노래하게 된 것이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포로기의 절망적 상황이다. 그런데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지내는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그 노역의 때가 끝나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40:2)라고 하시면서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억눌려 지내면서 심신이 모두 피곤한 상태였다. 강대국의 위엄 앞에 찌들려 살면서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신앙마저 흔들렸다. ‘소년도 피곤해 졌고 장정도 넘어지고 쓰러졌다’(40:30)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였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신 분”이시다(40:28). 그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이다(40:29). 그런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얻는다. 여기에서 ‘새 힘을 얻다’(renewing the strength)는 어원적으로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뜻이다. 계절이 바뀌어 새 옷을 입듯이, 전혀 다른 성격의 힘을 공급받는다는 것이다. 그 힘은 거듭남의 생명력이며 위로부터 주어지는 성령의 새로운 능력이다.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얻게 될 '새 힘'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다준다. 하나는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mount up)이고, 다른 하나는 달음박질(run)과 걸어감(walk)이다. 전자가 수직적 상승이라면, 후자는 수평적 전진이다.

 

(1)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신앙의 수직적 상승

: 여기에서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은 신앙의 비전(vision)을 의미한다. 위로 올라가게 되면 더 넓게 그리고 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하늘 높이 올라가면 땅의 것은 아무리 큰 것이라도 작게 보인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은 작년에 완공한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의 ‘부루즈 칼리파’로서 그 높이가 무려 512m나 된다. 밑에서 보면 굉장한 빌딩이지만 하늘 위로 올라가면 다른 빌딩과 함께 평면 위에 위치한 작은 공간일 뿐이다.

  

그것이 비전 있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루살이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넘어서서 하늘나라에서의 삶까지 바라보는 영원한 삶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중생의 새 생명은 오늘 여기에 제한된 삶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영원한 삶의 차원까지 우리를 끌어 올린다. 신앙 안에서 우리들은 땅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상향식 삶이 아니라 하늘 위에서 땅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향식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 하늘 위로 수직 상승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날마다 새롭고 깊어지는 관계이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2) 달리고 걸어가는 신앙의 수평적 전진

: 우리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며 살도록 보냄을 받았다. 그것이 달리고 걸어가는 수평적 전진이다. 여기에서 수평적 전진은 각자가 받은 사명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영향력의 결실을 의미한다. 만일 위로 올라가만 하고 땅위에서의 수평적 전진이 없다면, 그것은 육체가 없는 영혼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드셨다(창 2:7).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우리들은 영과 육의 균형이 필요한 것처럼, 비전의 상승과 함께 땅에서의 수평적 전진이 병행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의 땅을 바라보고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고 하셨다(창 창 13:14, 17). 약속받은 땅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바라보아야 하고 그 땅을 직접 밟아보아야 한다. 신앙 안에서 바라봄과 직접 밞아봄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가 없다.

  

수평적 전진에는 달려감과 걸어감이라는 두 형태가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달려가는 것이 좋겠지만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대로와 같이 거칠 것이 없는 곳에서는 맘껏 달려가야 한다. 그러나 좁고 험한 산길에서는 조심하며 걸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두 형태 모두가 앞으로 전진 하며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전진에는 곤비함이나 피곤함과 같은 후유증이 없다. 하나님과의 즐거운 동행이기에 지루하지도 피곤하지 않은 행복한 전진이다. 달리고 걸은 만큼 우리의 영역과 영향력이 증대되기 때문에 넘치는 기쁨과 보람이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