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병수교수

오직 하나의 말(딤전 3:8)

새벽지기1 2016. 11. 5. 08:43


말은 영혼의 길이지만 또한 영혼의 담이기도 하다. 언어가 있기에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또한 언어 때문에 사람들은 의를 끊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제법 처세를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이중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요리조리 피하면서 살 길을 찾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에는 일구이언을 즐기는 언어의 마술사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사회 전반에 유행하는 까닭은 거짓이 사회의 배후에 검은 세력으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언어란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다. 언어 뒤에는 생각이 있고, 생각 뒤에는 인격이 있다. 결국 어떤 사람이 일구이언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더 깊은 속에는 두 가지 인격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감독에 대한 권면을 마치고 집사에 대한 권면을 시작한다. 감독과 집사에 대한 권면을 비교해보면 유사한 것들이 적지 않다. 교회를 잘 이끌기 위해서 감독이든 집사든 공통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감독과 달리 집사에게만 해당하는 몇 가지 특이한 자질을 요구한다.

그 가운데 첫째가 집사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집사의 자질과 관련하여 언어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언어는 영혼의 길이며 또한 영혼의 담이다. 만일에 집사가 말에 성공하면 사람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고, 만일에 집사가 말에 실수하면 사람들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사의 언어에 따라서 교회가 건강해질 수도 있고 병약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구이언을 가장 단순하게 이해하자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말하는 것처럼 완전히 상반된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내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약 3:10-12). 실제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런 상반된 언행에서 비롯된다.

한 사안을 두고 이 쪽에 가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저쪽에 가서는 저렇게 설명하거나, 한 사람을 놓고 여기에서는 칭찬의 말을 하고, 저기에서는 악평의 말을 하는 행위는 성도에게 쓰라린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회복할 수 없는 분란으로 이끈다. 교회의 일군은 이런 언어를 멀리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언어의 배후에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일구이언이란 두 가지 생각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있을 때 나오는 언어 플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으로부터 극단적인 경우로는 정신분열적인 횡설수설이 튀어나온다. 꼭 이렇게 심각한 경우는 아니더라도, 두 가지 생각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있는 사람에게서는 평범한 사람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궤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이중적인 의미를 띄고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 뜻이 될 수도 있고 저 뜻이 될 수도 있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고도의 일구이언인 셈이다. 이런 언어 플레이는 교회의 일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를 조종하는 가장 은밀한 배후세력은 인격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일구이언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인격의 이중적인 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중적인 인격으로부터 일구이언이 나오는 것이다. 인격은 대체로 유익과 손해에 민감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이 말을 하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저 말을 하는 것에 익숙하다.

인격이 손익에 달려있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리를 고백하기 때문에 목숨까지도 내놓는다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구이언이란 이 세상에서 유익을 얻기 위하여 신앙고백을 버리면서까지 말을 바꾸는 처세이다. 이런 치사한 일구이언은 진정한 신앙고백 신자에게는 결단코 적합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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