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영적 엘리트주의 (고전2:12-16)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7. 2. 07:48



영적 엘리트주의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여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 12-16)


고린도교회에 보낸 이 서신서들을 공부하면서 신자가 갖는 신앙상의 어려움은 훨씬 교묘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신앙상의 훨씬 큰 문제점들은 신앙의 핵심인 신령해지는 것과 같은 것들은 놓치고 윤리적으로 고상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윤리적으로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금방 회개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문제들에 관해서는 보통 잘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남을 심판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아마 이 고린도서가 이렇게 길게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뻔한 이야기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너희의 지혜로 복음을 이해한 것이 아니며, 너희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고 그것은 우리가 깨우쳐서 믿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셔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조시키기 시작합니다. 14절에 있는 바와 같이 육에 속한 사람과 15절에 나타난 신령한 자라고 표현되는 사람들을 비교합니다. 이 두 부류를 사도 바울이 꺼내놓고 누가 신령한 자이며 누가 육에 속한 자인가 하는 것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성령이 있는 자는 신령한 자이고 성령이 없는 자는 육에 속한 자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신령해진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기 때문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육에 속할 수박에 없고 신령할 수 없으며 복음을 이해하거나 믿지 못합니다.


그럼 거꾸로 바울이 본문 12절부터 16절까지 있었던 내용, 즉 성령이 있는 자는 신령한 자이고 성령이 없는 자는 육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을 뒤집어서 한 번 질문을 해 보고자 합니다. 내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느냐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무엇으로 구별이 되느냐 그렇게 한 번 물어 봅시다. 여러분 스스로가 이 질문에 한 번 대답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할 때 여러분에게 성령이 와 계십니까? 와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러분에게 질문할 때 “성령이 와 계십니다” 혹은 “난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기준이 설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에서 이제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기준을 달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이 능력과 지혜가 아니라 성령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신령한 자는 성령이 있는 자이고, 육에 속한 자는 성령이 없는 자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면 뻔해 보입니다마는 뒤집어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성령의 유무를 판단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면 그렇게 자신 있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고린도교회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하는 성령의 소유의 유무를 성령의 은사로 기준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그러니까 고린도교회는 분명히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뛰어난 어떤 체험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이 이미 처음에 고린도교회의 특징을 이렇게 짚고 넘어갔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 : 4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 4-7).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느냐 소유하고 있지 않느냐의 기준을 무엇으로 잡고 있느냐 하면 성령의 은사로 잡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꾸짖으면서 복음의 내용 자체를 설명하고 본질을 규명하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무어라고 꾸짖느냐 하면 너희들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성령이 안 계신 것은 아니지만 신령한 자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수준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방불하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든가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같이 군다는 뜻입니다. 원래는 신령한 사람인데 신령한 사람답지 못하다 그것입니다. 무엇에서 틀렸느냐 하면 너희는 성령이 너희 안에 있느냐 없느냐의 기준을 성령의 은사로 다질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해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았어야 마땅하다 이렇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하는 문제를 무엇으로 아느냐 하면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 : 1-3).


우리가 성령을 소유했느냐 안했느냐는 무엇으로 아느냐 하면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느냐 못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신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지 못합니다. 이해의 차원에서만 그렇지 않고 능력의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풀려나지 못하면 우리는 아까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세상의 신이 끄는 대로. 사탄이 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입니다. 자주권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권리와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서 예수를 믿을 지식도 능력도 없는 존재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내용 속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또 저들이 십자가와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왜 성령을 도입하고 있느냐 하면 성령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을 밝혀주고 깨우쳐 주실 수 있는 분이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외부로부터 도움과 간섭 없이 인간이 자기 홀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알거나 구원을 획득하거나 선택하고 이해할 실력을 가진 자는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성령이 여기 도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거나 십자가를 이해할 자가 없고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우리 중에 아무도 예수를 믿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그것을 다시 설명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성령님이 도입되는 이유가 성령님의 존재가 부각될수록 우리가 얻은 바 구원과 우리가 이해한 바 신앙의 내용들이 은혜로 받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거저 주신 것이라는 은혜가 강조되기 위하여 있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묘하게도 성령님이 저들 안에 있는 것이 자랑으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성령님이 자신들 안에 있는 것이 자랑으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성령님이 자신들 안에 와 있다는 것을 성령의 은사, 성령의 나타남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신령한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신령해졌다는 것이 바울의 사상이고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르냐 하면 자신들이 신령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오셔서 도장을 찍어 주었다고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식으로 이야기하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은혜요, 감사거리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성령님이 와 계신 것이 오실 만하기 때문에 온 존재라는 우월감으로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아주 교묘하지요.


그래서 이 시험을 한국교회가 한 10년 전쯤에 요란하게 한번 겪었습니다. 방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때 완전히 돌반에 속했었죠. 학교다닐 때 우반, 돌반 나누었던 기억이 나시죠, 방언 못하는 사람은 다 돌반에 속하고 방언하는 사람은 자랑으로 갔었던 것이 기억나십니까? 이것이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신령하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성령님이 다른 기준이 낮은 자들하고는 대화도 되지 않고 주어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이제 내가 신령해졌기 때문에 내게 주면 내가 이해도 하고 감동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방언은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니라 나쯤되어야 주는 것이고 성령님이 누구에게나 오시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수준이 낮아서 체험되지 않는데 나는 그것이 체험되는 이유는 내가 신령하고 고급한 신자이기 때문이라고 이해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자란 저들에게 있어서는 자랑이 되었죠. 그렇게 되자 무엇이 없어지느냐 하면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이니까? 십자가란 우리 모두를 정죄하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만큼 우리를 절망으로 끌고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무능하며 무력하며 무지하며 절망밖에 남은 것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 값을 우리의 목숨을 가지고도 갚을 수 없다는 고백이 십자가입니다. 죽으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빚들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의 자리에 갔어야 되는 것이 우리의 죄 아닙니까? 그래서 그 죄값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고귀한 피값으로 갚으셔야 했던 것이 십자가가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이 피를 흘리셔야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십자가가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 능력과 내 값으로 지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 신령함이 십자가가 없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신령하면 신령할수록 성령의 소유가 분명하고, 성령의 존재가 부각되면 부각될수록 그 모든 것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죽음이 더 분명히 부각되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 되고 모든 자랑이 저들에게 돌아가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1장에서 2장 마지막 절까지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놓고 벌이는 논쟁이 핵심들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우리가 어떻게 이젠 신적인 수준에 올라있는가를 확인하는 표가 아니라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모든 신령한 것과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 성령께서 이 복음과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개입해야 될 이유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인 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을 도입하는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 : 12을 봅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예를 들면 전도도 성령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그 전도가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도 성령께서 알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도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은사마저도 그 은사가 무엇이냐를 성령께서 알게 하지 않으면 성령의 나타나심과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성령이 가르쳐 주시지 않는 한 그런 것들은 잘못하면 우리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바울에게서 성령은 신앙 내용의 전 영역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소유하는 유일한 열쇠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신령한 일에 관한 한 우리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는 전혀 미칠 수 없는 부자격자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여기 논쟁에 바울에 의해서 성령이 도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거듭 강조합니다마는 한국교회의 교인들에게는 성령의 나타남이 무슨 증거였다구요? 자신들의 수준 높음의 표였습니다. 수준 높음의 표가 나에게는 성령이 나타나실 수 있었다라는 것으로 이해되어 자랑이 되었고 그 대신 십자가의 가치가 감추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오해한 것과 같이 기독교 역사상 아주 대표적으로 오해되고 부작용을 낳았던 구절들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과 우리가 다음에 공부할 3장 초반에 있는 내용들은 영적인 엘리트 의식을 낳게 하는 대표 구절로 오용되어 왔습니다. 엘리트란 우리말로 적당한 표현이 없으니까 제가 그냥 쓰겠습니다. 영적인 엘리트주의. 그러니까 신자들 중에도 등급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신자들 중에 등급이 있습니다. 무슨 등급이냐 하면 더 성숙한 신자와 덜 성숙한 신자는 있습니다. 3장에 가면 그게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 : 1). 어린 수준이 있고 성숙한 수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과는 다릅니다. 같은 차원에서 덜 성숙하고 성숙하고의 문제이고 그것을 떠나서 종자가 다른 계급의식을 갖는 영적인 엘리트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개나 고양이 수준이고 자기네는 사람이고 하는 수준으로 아예 종자가 다른 신앙상의 등급과 차원이 다른 신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가 기독교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이런 생각을 다 한 번씩 해 보았을 것입니다. 전도하러 나갔다가 누구에게 전도를 하는데 그 사람이 극악무도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것 하자고 전했는데 아주 못되게 구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 넌 지옥가도 싸다.’ 그것도 사실은 영적일 엘리트주의의 한 부류입니다. 그 사람이 못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께서 아직 그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좀 나아서 전도했을 때 보고 우리가 착해서 반응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다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를 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아무도 십자가를 요구하고 주님보고 오라고 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간섭한 자이고 그들은 아직 그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넌 그러니까 지옥 가지’ 그런 생각이 든다구요. 어떤 신비한 은사의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 이것이 좀더 확대되어서 나타납니다.


얼마 전에 이런 재미난 일이 있었습니다. 손가락질하면 넘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안 넘어진 사람들이 매우 열등감을 가졌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큰일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넘어지는 사람들은 보다 신령하고 안 넘어진 사람은 보다 완악하다고 누구나 생각했습니다. 다 이런 개념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했느냐 못했느냐는 마찬가지일지라도 기왕에 마찬가지일 바에는 어떤 쪽이 나아요? 해 보는 편이 낫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닙니다. 해 볼 필요 없습니다. 없다는 것은 너무 했나요? 한 사람에게는 한 것이 낫고 안한 사람에게는 안한 것이 낫습니다. 어느 쪽이라고 꼭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라는 것은 대부분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은사라고 그럽니다.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타민을 먹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사들의 말은 특별한 병에 걸려서 비타민이 필요하지 않으면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 세 끼 편식하지 말고 밥 잘 먹으면 그것이 보약이다 그럽니다. 필요한 것은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 끼 먹는 식사 속에 필요한 비타민과 영양소가 다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했던 주사약이 무엇입니까? 알부민, 그것 맞으면 갑자기 무슨 힘이 솟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것은 죽을 둥 살 둥 할 때 놓는 긴급 처방이지 비축되는 영양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좋아합니다. 어떻든 안하는 것보다 낫겠지 이것이 우리 생각 아닙니까?


영적인 엘리트주의라는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이 내가 신령하고 높은 경지에 가 있다는 확인으로 오해되는 일이 신앙의 한 소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가장 큰 목표와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다른 데 있는데 모든 신앙의 정열과 노력과 수고와 욕심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바로 이것 ‘내가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고 하나님 앞에 다른 보통 사람보다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로 갑니다. 영적인 엘리트주의를 요구하는 데로 모든 노력과 모든 열심과 모든 욕심과 의지와 이런 것들이 집중이 되어서 마땅히 해야 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실제로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이런 신비한 비밀,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훨씬 다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식으로 이야기하면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모든 비밀은 십자가입니다. 골로새서 1장으로 가 보십시다. 신앙의 최고의 핵심,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하게, 다른 것은 다 못해도 좋으니까 이것만은 빼앗기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언제나 이것입니다.


골로새서 1 : 14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니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 : 14-23).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케 되기를 원합니다. 교제를 요구하시는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최고의 핵심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특별한 대접을 받고 저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신령한 어떤 비밀스러운 책임으로 몰고가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 아니요. 성령님이 우리의 삶과 존재에 개입하는 이유가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만나기를 원하시는 모든 충만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고 그 충만한 것으로 우리와 만나서 자신과 화목한 교제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아들을 아는 것‘ 그 교제 속으로 들아가는 것이 다 어디에 있느냐,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속,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신앙의 핵심이며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가장 신령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 성령님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내게 알게 하시고 나를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서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사귀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따로 산 기도 가셔서 갑자기 무엇을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희 교회가 이렇게 난방 시설을 하기 전에 야구장 시스템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어떤 분이 새벽기도에 오셔서 어찌하든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확인을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뜨뜻해지더란 말입니다. ‘야 이것 무엇이 오는구나’ 그때 눈을 안 떠야 되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눈을 떴답니다. 이상해서 봤더니 가스불이 들어온 것이더랍니다.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체험은 받지 마시고, 거기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결국 모든 싸움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가야 됩니다. 십자가가 부각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깨끗이 하셨다는 것보다 더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장소, 어느 때, 어느 형편에서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지금 아버지를 간절히 찾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실 것입니까’ 그러셔도 됩니다. 건방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최고의 경외심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앞에 나가셔야 마땅합니다마는 그러나 여러분이 자녀인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땅히 구하고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났느냐를 확인한 것으로는 그것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것을 쓰십시오. 어디에 가서 남다른 책임을 요구하지 마시고 방언을 했건 새로운 감격, 새로운 희열을 맛보려고 하시지 말고 자꾸 그것을 요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저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알게 해 주십시오” 그것을 요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알게 하시고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입술로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고백을 하게 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 : 24-27). 충만, 영광의 소망 이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다른 체험 속에 있지 않습니다.


옛날 유명한 연예인들 중에 이런 간증을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뒤집혔는데 하늘이 열리면서 나는 깜짝 놀라 미칠 것만 같았죠. 그래서 회개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가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과정에서 어떤 충격과 체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깨달았느냐가 그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머리를 깎고 눈썹을 밀고 머리띠를 매고가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합니다.


충만과 영광은 어떻게 소유합니까? 들어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십시오. 그러나 지금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자기들 치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님마저도 액세서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령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마저도 본인들이 얼마나 신령한 자인가, 얼마나 신적 지위에 접근한 자인가를 증명하는 표로밖에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 같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늘 있어 왔던 싸움입니다. 서신서 중에서 제일 긴 서신서가 고린도전서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싸움에 매달려 있습니다. 훨씬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신비한 체험으로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을 치장하는 데 훨씬 몰입되어 있고 어떤 부분의 죄에 대하여만 민감하느냐 하면 간음, 도적질, 십일조, 이런 것들에만 훨씬 민감해져 있습니다. 술, 담배 이런 것에는 너무 예민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영광의 소망의 충만한 것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일에 대하여, 이것을 포기하고 외면하고 자꾸 게으름을 떨고 있는데도 아무도 자신이 얼마나 지금 완악하고 게으르고 딴전을 피우고 잇는가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이는 적습니다.


언제나 교회 안에 있는 싸움거리들은 누가 누구보다 잘났느냐의 싸움입니다. 제일 무서운 싸움이 하나님과 가깝다는 것을 누가 목사와 가까우냐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참 답답한 싸움입니다. 골로새서 2장으로 갑시다.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입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 : 1-3).


다른 체험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십시오. 성령께서 왜 오셨다구요?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잘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치장으로 가지 마십시오.


고린도교회의 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네들이 복음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자기네들이 척 듣고 아 이거다 하고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자기네들이 벌써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을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 것만 보아도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신 무엇에 가서 걸렸습니까?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이해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랑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자랑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다 불쌍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9장으로 갑시다. 이 모든 말을 구약에 이미 다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 : 23,24). 무엇이 지혜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이 무얼하시는 분인 것을 아는 것,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라는 말에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6장으로 갑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을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 : 1-3).


하나님은 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의롭고 누구에게는 불공평한 분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시고 변함이 없으시고 성실하신 분입니다. 그분을 아는 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 전부입니다. 우리가 믿고 알아야 되는 모든 것입니다. 같은 호세아서 4장으로 가시면 6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여기서 지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 결국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 능력, 내 재주가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신령한가 그가 얼마나 신앙이 좋은가 하는 것은 결국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 것이 내가 얼마나 똑똑한가로 등장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성령님은 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등장한 것입니다. 십자가와 성령 없이는 내가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 결국 우리는 모두 다 무가치한 존재고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고서 복음과 신앙은 쌓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신앙과 여러분의 신령함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나타나야 되고, 십자가가 강조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자랑할 것이 십자가밖에 없다고 자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윤리적인 것, 도덕적인 것,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실은 더 심각한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해야 될 신앙이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데 열심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주님 앞에 돌아와 우리 하나님과 사귀며 하나님을 깊이 알며 그 변함 없으시고 성실하시고 성령님을 우리 안에 오게 하시사 교통하시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는 제쳐놓고 있다는 데 죄책감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하심, 그 영광의 소망, 그 안에 있는 모든 비밀들을 여러분들이 제대로 누리고 감사하고 그 안에서 여러분들의 자랑과 영광을 마음껏 누리시기 위해서 이 경고들과 가르침들을 여러분들의 유익한 가르침으로 명심하셔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