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사실은, 우리의 논의가 인간의 법정이 아니라 하늘의 법정에 속한 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초라한 척도를 갖고 행위의 순전함을 재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궁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경솔하고도 대담하게 그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자행하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확연히 드러나는 무거운 질병에 걸려 흉악한 몰골을 하고 있거나 피부 속까지 곪아서 흐느적거리는 사람들만큼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자신에게 떠들어대는 자들도 없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의 공의로, 너무도 완전하여 모든 부분에서 온전하며 그 어떠한 흠도 부패도 없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의 가치를 완전히 평가 절하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는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발견된 일도 없고 앞으로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심판주를 바라보되, 우리 마음에 상상되는 대로가 아니라 성경에서 우리를 위해서 묘사하고 있는 대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그분을 가리켜서 그의 광채로 별들을 어둡게 하시는 분이시요(욥3:9), 그의 힘으로 산들을 녹이시며 그의 진노로 땅들을 진동시키시는 분이시요(욥9:5-6), 그의 지혜로 지혜로운 자들의 간계를 무너뜨리시는 분이시요(욥5:13), 그의 순결하심 옆에서는 만물의 더러움이 드러나는 분이시요(욥25:5), 그의 의는 천사들이라도 견딜 수 없는 분이시요(욥4:18), 죄지은 자들을 무죄한 자로 만들지 않으시는 분이시요(욥9:20), 그의 분노의 불이 일어나면 지옥까지도 불사르는 분이시라(신32:22)고 묘사하고 있다.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사람의 행위를 살피시는 그분을 바라보자. 과연 누가 그의 보좌 앞에서 설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사33:14-15).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130:3). 과연 모든 사람이 곧바로 망해 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욥4:17-20).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욥15:15-16).
사실, 욥기에서는 의를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높은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와 율법이 이렇게 서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설사 어느 누군가가 율법을 만족시킨다 하자.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그 의의 테스트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그 의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하늘의 심판주 앞에서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죄의 책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서 기꺼이 몸을 숙여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칭의에 대한 논의 전체가 어리석은 것이 되고 무력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람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헛되이 우리 자신을 높이기를 그만두고, 눈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두려워 떨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사실 사람들끼리만 비교하는 데서 그치면, 우리 자신을 높이게 되기가 쉬운 법이다.
눈에 보이는 하늘을 우리 몸으로 대할 때에 일어나는 현상과 똑같은 현상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대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물체를 눈으로 보면 똑똑히 보여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면 그 찬란한 광채를 견디지 못하고 시력이 마비되어 버리며, 땅의 물체를 볼 때에 강력하게 힘을 발휘했던 시력이 완전히 무기력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허망한 우리의 확신 때문에 속아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자, 가서 여러분의 의를 사람들 가운데서 떠들며 얼마든지 자랑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것을 가증히 여기실 테니 말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교훈을 받는 하나님의 종들은 과연 어떤 심정일까?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9:2-3).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 사람의 그 어떠한 행위로도 절대로 만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천 가지 죄를 조사한다면, 우리는 그 중 단 한 가지에 대해서도 깨끗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신 도구인 바울이 바로 그런 의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고전4:4).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287-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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