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저항권으로서의 무력 사용
쉐퍼는 국가의 위법적인 행동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시민 불복종 운동을 통하여 이 것을 개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럼 시민 불복종 운동은 어떤 식으로 할것인가? 이것은 매우 주요한 사안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쉐퍼는 상황에 따라 무력 사용까지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특별히 복음주의 교단내에서는 충격과도 같은 선언이라 생각한다.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를 책망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듯이 예수님과 제자들은 평화주의자들이었다는 사고에 젖어있기에 무력사용의 문제는 엄청난 폭탄인 것이다.
쉐퍼는 이러한 시민 불복종의 사용에 있어서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쉐퍼는 불복종의 사용에 있어서 사무엘 러더포드의 입장에 따라 세가지 입장으로 제안하고 있다. 첫째는 그저 항거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가능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는 것이다. 세째로 가능하다면 무력[Force]을 사용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다. 쉐퍼는 사람들이 어떠한 종류의 무력이라는 것에 대해서 꺼려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무력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이 격언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저항이나 무력이 사용되기 전에 반드시 재구성을 위해 힘써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력을 사용할 만한 타당한 근거를 가졌거나 그에 따르는 반응을 예측하고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형편이라면 어떤 시점에 도달할 때에 무력의 사용이 정당화 될 수있다고 하였다. 쉐퍼는 폭력이 난무하는 무정부의 형태를 결코 찬성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폭력의 어떠한 형태든지 결코 용납될 수없다. 무력은 폭력과의 분명한 구별이 있으므로 이를 이해 해야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타락된 세상에서는 언제나 어떠한 형태로든 무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쉐퍼는 무력사용의 옹호론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타락한 세상에서의 정부가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쉐퍼는 낙스와 러더포드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무력은 국가의 전유물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쉐퍼는 이러한 무력의 한 형태는 1차적으로 저항의 모습으로서 흔히 말하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항거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어 있을 뿐 아니라(쉐퍼는 이것을 '열려있는 창문'이라고 말한다.) 아직은 도피하거나 불복종할 단계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쉐퍼는 이에 더 나아가서 2차적인 무력의 사용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도피할 길이나 저항할 길이 막혀 버릴 때 자기 방어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타탕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독립운동이 그러한 예로서 온건한 역혁명론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쉐퍼는 시민 저항운동의 예를 낙태 반대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와 함께 시민 저항 운동의 위험성이 무엇이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의 원칙이 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쉐퍼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한계선[Bottom Line]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쉐퍼는 미국이 나라를 세울 때에 이러한 정신[낙스와 러더포드의 Rex Lex의 사상] 입각하여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쉐퍼는 강조하기를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자기 기본권이 제도적으로 위협당할 때 그 정부를 개혁하는 것이 사람들의 의무이며,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무력으로라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만약 어떤 국가 기관이라도 하나님의 법에 반대하는 것을 명령한다면 그 기관의 권위는 소멸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법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은 우리가 권력의 독재적인 횡포에 적절한 단계를 취하여 반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론
프란시스 쉐퍼의 사회참여는 낙태반대운동과 시민의 불복종운동뿐이 아니었다. 그의 사회참여는 다양한 부분에서 이루어졌다. 공해,정치,법,문화의 각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이러한 행동주의는 인생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는 그의 분명한 신앙의 실천이었다.
진리에 대한 사회적 실현에 대하여 특별히 법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쉐퍼의 접근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의 모습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 구조의 문제를 이러한 현실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않은가? 꼭 그리스도인들이 피켓을 들고, 현장에 뛰어들어서 행동하여야 하는가? 이것은 성경을 믿고 있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맞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더욱 복음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개인적이거나 시민적이 불복종운동이 과연 우리에게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쉐퍼는 물론 인간의 모든 구조가 완벽해지리라고 믿고 있지 않다. 완벽한 변화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쉐퍼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는 현실적인 것이다. 성경은 이상주의나, 낭만주의 그리고 현대의 사실주의와는 다른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정직한 답을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진리로 보았다. 그러기에 성경은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의 인본주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진 자들이 하는 행태들을 보고만 있다면 1년에 150만명이상이 되는 태아들이 죽어가는 그 아우성을 피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쉐퍼는 이러한 생각은 몽상에 불과 하다고 외치고 있다. 타락된 세상에서는 단지 이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투쟁방법에 있어서 기독교적인 해결책만 사용하고 정치적인 면으로 투쟁하지 않는 것은 너무 이상주의에 치우치게 되는 반면, 기독교적인 해결책을 쓰지 읺고 정치나 법적으로만 해보려는 것도 불완전하고 그릇된 생각이다. 그 생각에 있어서만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순종한다고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도 그릇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해결책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성경대로 사는 것이 못됩니다. 적합한 정도의 시민 저항의 한계선을 지키지 않을 때는 국가가 그 권위를 팽창시켜 성경대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쉐퍼는 이러한 분명한 인식이 다음에 또 다른 한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한 성경적 입장을 갖는 동시에 모든 가능한 한 대안을 갖고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안이 없다면 우리의 노력은 허공에 멤도는 소리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쉐퍼는 기독교적인 대안의 실천이 물질이 필요하고 헌신이 필요하는 영역에 있다하더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쉐퍼는 인본주의 세상에 우리의 기독교적인 대안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완전하지 않지만 실제적인 치유책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쉐퍼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사회,정치,법,문화,환경의 문제에 참여하여 불의한 것을 알리고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실제적 현실주의자이다. 또한 그는 현실을 바로 알고 경고한 선지자였다. 그는 공허한 정치가도 아니고 연설가도 아니다. 그는 선지자의 가슴을 가진 현실주의자였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선지자적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명령되어 있는 기독교적 대안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적절한 단계에서 정치적,법적 수단으로서 시민 불복종의 한계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역시 성경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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