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쉐퍼의 사회 개혁운동의 시대적 이해(9) '낙태 반대 운동'

새벽지기1 2016. 6. 1. 06:49



제1장 사회 참여 운동

제1절 낙태 반대 운동

낙태에 대한 관심은 복음주의 교회내에서는 변두리의 문제였었던 시대에 낙태의 문제를 복음주의 교회의 중심으로 이동시킨 인물은 바로 프란시스 쉐퍼이다. 그는 1973년도의 로드 대 웨이드 사건 이후로 사회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낙태 문제에 대하여는 매우 투쟁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낙태문제의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낙태는 인본주의 사고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학적 법의 해석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인본주의적 유물론적 인간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극악 무도한 죄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1년에 150만명이나 되는 태아가 합법적으로 죽어가는 현실은 곧 바로 영아살해와 안락사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내다 본 쉐퍼는 이 일을 막기 위하여 사회 현장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쉐퍼는 1979년에 에버레트 쿠프박사와 함께 『인간,그 존엄한 생명』(Whatever Happended to the Human Race?)를 저술하고 프랭키 쉐퍼와 다시 영화를 만들고 강연을 하면서 낙태 반대 운동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주의는 복음주의 사람들에게 쉐퍼의 견해가 모호하다고 하여 그를 헐뜯을 새로운 핑계를 찾아냈다. 쉐퍼는 복음주의적 정치 자유주의자들이나 짐 웰리스와 Sojourners잡지나 로날드 사이어와 같은 '사회적 실천을 위한 복음주의 동맹'의 사람들에게도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주되심을 확신한다면 그 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그는 확신 하였다. 그러기에 쉐퍼는 그의 말년에 많은 사람들(복음주의자들)과 소원한 관계를 가져오는 아픔을 겪어지만 복음주의자들의 관용에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사랑안에서 싸웠던 것이다. 

쉐퍼는 낙태반대운동의 실천은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함을 강조하였다. 이 운동의 주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럴 때에 변화가 주어질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쉐퍼는 이러한 운동을 위해서는  
"첫 번째로 낙태와 영아 살해,안락사에 관하여 당신 자신이 먼저 인식하고 당신의 가족을 교육하고, 이웃들을 교육하라. 그들에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에 있는 태아의 발당 과정에 관하여 사실을 말하라.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태아에 대한 의학계와 법조계의 사례를 설명해주라.

둘째,여러분의 이웃과 공동체안에서 낙태를 하는 일이 없도록 설득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진작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라. 신문을 읽고 편집자에게 편지쓰기 운동을 전개하라. 

셋째,교회들은 생명문제들에 관한 교육을 위하여 또 하나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장년 주일 학교에서 이 문제들에 관하여 토론하도록 하고, 특별한 연사들을 초빙하여 세미나를 개최하고 주일 저녁 예배시간에 설교하도록 한다. 

넷째, 생명의 옹호의 목소리가 필요한 사회를 향하여 특별한 세미나, 토론의 광장등이 있음을 인식시켜라. 

다섯째,정치분야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많다.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주의 권리는 유권자들을 조직하여 생명 옹호 후보자를 당선시키기 위한 노력하라.

여섯째. 특히아동을 가진 부모들 역시 우리의 도움이 필요로 한다. 계획을 짜서 일주일 동안 스케줄을 만들어 교회의 지체들이 그 아이를 보살펴주고 그 부모에게 꼭 필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것이다. 낙태를 시켜주는 개인 병원과 종합 병원을 감시하고 이 사회가 묵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쉐퍼는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쉐퍼는 이러한 모든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결코 침묵을 지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쉐퍼의 사회 개혁운동은 단순한 구호에 그치는 운동이 아니었다.

그는 라브리에 많은 미혼모를 보호하고 새힘을 주었으며, 교인들 중에 비싼 치료 수업을 받을 수 없는 특수아를 돕는 일에 주당 몇 시간을 함께 있어 주었다. 그는 피켓 시위도 하였으며, 암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쉐퍼는 자주 워싱턴에 가서 대법원 판사와 정부 관리들을 접촉하면서 계속해서 인간존엄을 파괴하는 정책을 중지하라고 끈질기게 촉구하였다. 쉐퍼는 가르침과 삶과 행동으로 앞장 섰다. 그의 운동은 진리의 실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