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쉐퍼의 사회 개혁운동의 시대적 이해(8) '현실적 파수꾼으로서의 사역'

새벽지기1 2016. 5. 30. 21:59


사회개혁에 대한 후기의 사역 -현실적 파수꾼으로서의 사역


"인생 전반에 걸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한 쉐퍼의 후기 사역은 1973년을 기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적 파수꾼의 사역에서 현실적 파수꾼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1973년 1월22일 미합중국 대법원의 로우 대 웨이드 사건 및 도우 대 볼톤 사건을 판결하면서 헌법 안에는 새로운 권리 또는 자유가 존재한다고, 즉 어느 때에든지 여자에게는 낙태할 권리가 있다고 판시한 사건이었다. 쉐퍼는 이 사건이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낙태는 단순한 하나의 독립된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 동시에, 인간을 "마음대로 처분 할 수 있는 쓰레기"조각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극단적인 한 결과로 보았다. 

쉐퍼는 시대의 위험을 직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회에 대하여 경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1973년 이후에 출판된 그의 저서를 통하여 인식할 수 있다. 『Two Conflict,Two Realities1974』,『No Little People(1974)』,『Joshua and The Flow of Biblical History(1975)』,『No Final Conflict(1975)』,『How Should We Then Live?(1976)』,『A Christian(1981)』,『Whatever Happended to the Human Race?(1983)』『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1984)』 

쉐퍼의 후기 저서는 쉐퍼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쉐퍼의 입장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쉐퍼를 비판하는 이들은 쉐퍼의 낙태 문제에 대하여 피상적이며, 일관성이 없는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쉐퍼는 정의에 대하여 이데올로기적인 정의감에 도취되어있다. 그러므로 매우 긍정적인 초기의 사역과는 달리 다소 잘못 길을 들었던 후기의 쉐퍼가 있다고 비판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레인 데니스가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듯이 매우 피상적인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도 언급하였고 또계속하여 살펴 보겠지만 쉐퍼의 사상과 삶은 매우 일관된점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1973년의 로우 대 웨이드사건은 프란시스 쉐퍼에게 있어서 새로운 사역으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그는 1974년 아들 프랭키와 함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생애에 있어서 도전을 준 사역이었다. 그것은 케네스 클락의 「문명」에 대한 대답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클락은 무신론적 입장에서 서구 사회의 문명을 서술하였고 그것이 영상매체로 방송을 탔던 것이다. 클락은 기독교가 지적인 노력과 성과들의 적이라고 가르는 것에 대하여 쉐퍼와 프랭키는 기독교가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지적인 대답을 줄 수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쉐퍼와 프랭키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에 관한 책과 영화 시리즈를 통하여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문화 사상사를 다룰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전 생애에 있어서 다른 그 무엇뿐만 아니라 문화의 영역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통치를 매일매일 실현하는 것. 사회적인 논쟁들과 정치적·법적·의;학적인면과 정부에 관한 논쟁 등 보이는 현실세계속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장 시켜 나가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의 후기 사역의 전환점이 로우 대 웨이드 사건이었다면 사상적 포문을 연 것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에서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쉐퍼는 이 책을 통하여 서구 문화사에 있어서의 철학적,과학적,종교적 흐름이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기독교적 시각에서 보여 주었던 것이다. 특별히 이 책을 통하여 사회적인 논쟁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역사적 증거를 통하여 제시하므로 사회 개혁은 세속 사회속에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장 시켜 나가는 사역으로 보았다.

그는 황금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삶에 통일성을 주고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게혁을 언급하면서 종교 개혁자들의 사회를 향한 바른 모습의 원천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은 사회적,정치적 완성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점차로 거대하고 유일한 개선을 가져왔던 것이다. 정치적 자유를 가져다 주었으며, 이것은 혼란하지 않으면서 엄청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성경에 기록된 절대기준에 대한 합의 때문에 자율를 가지고 혼란에 빠지지않는 참된 가치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쉐퍼는 종교개혁이 가져다 준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법률의 영역 그리고 사회 개혁에 있어서도 그 기초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그는 폴 로버트의 "정의가 국가를 끌어 올린다"는 벽화를 통해서, 로잔 학술원의 교수였던 알렉산더 비네의 선언을 통하여서,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목사요 성 앤드류 대학의 총장이었던 사무엘 러더 포드의 법률은 왕이다[Lex Rex:Law Is King]라는 그의 책과 사상을 예로 들었다. 특별히 사무엘 러더포드의 사상은 미국의 죤 위더스푼[1723-1794]과 죤 로크[1632-1704] 그리고 토마스 제퍼슨[1743-1826]에게 영향을 주므로 미국 헌법의 기초를 재공하였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두가지 원리를 주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정부의 체제와 자유의 진정한 기초가 그것이다. 후자는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투표의 51%라는 것이 정부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궁극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의 절대성은 사회를 판단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소시민' 즉 일반 시민은 어느때라도 일어서서 성경적인 가르침에 기초하여 대다수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란시스 쉐퍼는 사회의 영역에서도 성경의 원리가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믿은 개혁자들을 언급하였다. 인권의 사각지대인 감옥의 개혁을 외쳤던 죤 하워드[1726-1709], 뉴 케이트의 죄수들에 대한 운동을 한 엘리자베스 프라이[1780-1845], 광산과 공장에서의 아이들과 부녀자들의 칙취를 방지하기 위하여 끊없는 항쟁을 한 샤프츠 베리경[1801-1885],노예무역에대하여 반대하였던 죤 웨슬리, 죤 뉴우톤,토마스 클라슨,그리고 노예 입법을 폐자한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등은 기독교인으로서 알관성있는 삶을 살았던 개혁자들이었다.

쉐퍼는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삶은 분명한 일관성있는 삶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개혁의 영향은 계몽주의와 공리주의 그리고 과학적 합리주의 영향아래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영향아래 그 영향력은 사라지고 현대인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만을 누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특별히 미국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어 버렸다.  

쉐퍼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주목하기를 이제는 현대적 현대과학이 (포스트모던과학) 사회과학적 과학이 되어버렸듯이 시민법도 사회학적인 법이 되려는 쪽으로 움직였다. 결국 법은 견고한 기반이 없는 가변적인 내용을 담게되었다. 법은 법원이 사회학적으로 잠시 유익하다는것에 대하여 내리는 법원의 판단에 근거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법은 철저히 자의적이 되었다. 그 결과가 의학적인 모습에서도 나타났다. 낙태와 안락사도 바로 이러한 자의적인 기반위에서 되어졌으며 그리고 기독교적인 합의가 사라진 곳에 나타난 사회학적인 대안은 별로 많지 않았다.첫번째 가능성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쾌락주의이고 그리고 또 한가지는 51%의 절대성이다. 세 번째는 "권위적,자의적,절대를 주는 한 사람 혹은 엘리트의 출현이다.

이제 사람들은 개인의 평안과 만족만을 준다면 어떠한 절대주의 국가 즉 독재국가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히틀러정권의 새로운 모습이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엘리트 정부를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여러 종류의 압력이 존재한다. 그 압력은 1. 경제적 붕괴, 2. 세계식량과 다른자연 지원의 심해지는 부족, 3.전쟁, 4. 폭력의 혼돈, 5. 세계의 부의 급진적 분배가 있을 것이다.6.세계의 식량과 천연 자원의 계속되는 부족

쉐퍼는 이런 상황에서는 오직 두가지 대안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현실로 들어났다.

"첫째는 강요된 질서, 둘째는 다시금 처음에 혼란없는 자유를 주었던 그 기반, 즉 성경에서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후기 사역의 포문이 된 이책을 통하여 현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 사회를 향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세계관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쉐퍼는 그의 설교에서도 증거하였듯이 이 시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시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바른 인식이 있은 이후에 바른 개혁이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쉐퍼는 그의 초기의 사역이 이제 사회의 전체 영역으로 퍼져야 함을 보았던 것이다.

쉐퍼는 이 책을 기점으로 하여 1979년에는 『인간,그 존엄한 생명』(Whatever Happended to the Human Race?)라는 낙태와 안락사,영아 살해의 문제를 책과 영화를 통하여 사회에 경고하였고, 그 이후에 1981년에는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특히 정부에 관한 관점에서 복음주의 교회에 하나의 폭탄과도 같은 "기독교 선언"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쉐퍼의 사역은 그의 마지막 저서인 "위기에 찬 복음주의"에서 그의 일생의 작업이 무엇이었고,사회를 향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엇이어 하는지를 외쳤던 광야의 외치는 소리와 같은 20세기의 선지자의 외침이었던 것이다.

제3장 결론  

프란시스 쉐퍼의 전기사역과 후기 사역을 살펴 보았다. 그의 사역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사역은 성경적 진리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에 일관성이 있음을 볼 수있다. 그러나 쉐퍼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초기 사역은 올바로 갔으나 그의 후기 사역은 잘못된 길로 갔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쉐퍼의 사상은 일관성을 주장하는 자신의 입장과는 달리 초기의 쉐퍼와 후기의 쉐퍼로 분리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쉐퍼는 그의 마지막 저서인 『위기에 찬 복음주의』서문에서 일관된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변증하고 있다.

"독자가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내게는 어딘가 모순이 있으며 또한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이것을 지녀 왔다는 사실을 먼저 말하고 싶다.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한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23권의 책을 썼다. 나의 초기 저술은 특히 철학에 관한 지적 문제들과 문화 영역의 제문제를 다루었다. 그 다음에는 기독교 생활과 교회 문제를 다루는 책들 썼다. 더욱 최근에 이르러 나의 여러 책은 특히 시민적인 필요성과 법적이고 정치적인 필요성의 분야들을 다루었다.

나의 모든 저술을 통해 공통적이며 통합적인 제목 하나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인생 전반에 걸친 그리스도의 주권"[the Lordship of Christ in the totality of life]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주님이시라면, 그는 삶 전체의-물론 영적 문제들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지적 문제들과 문화, 법률, 정치의 영역의 문제들을 포함한 삶의 전분야에 걸친-주가 되셔야만 할 것이다. 나는 내 저술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 전도(evangelism, 인간 남녀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도록 돕는 행위)의 중요성과 및 주님과 날마다 걸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기도 생활을 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긍휼,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일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시 말해서 문화와 사회의 온갖 영역에서 실생활에 옮길 필요성을 똑같이 그리고 동시에 강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