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5)

새벽지기1 2016. 4. 24. 08:29


주 되심의 영성

넷째, 늘 새롭게 된다.

회복된 하나님 형상은 그 본질이 역동적이다.  그것은 과거, 현재 아니면 미래의 어떤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늘 새롭게 되는 실재(reality)이다. 이러한 뜻에서 그것은 순전히 새로운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그리스나 동양의  철학과 대조를 이룬다. 역동적 공동체는 그것 스스로 변화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변화의 불가피성을 내포한다(S. H. Mayor, “Jesus Christ and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Society,”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32/1, 1979: 49-51).    

 
다섯째, 늘 자신을 새롭게 하는 사람은 자기를 개방한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개방한다(open). 나와 우리만을 아는 이기주의에 머물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공동체는 어떤 특정 종교, 문화 및 계층의 사람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인들만의 공동체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동체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 인류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여섯째, 보편 가치를 추구한다.

자기개방성은 개인과 공동체가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 사람들과 함께 보편 가치를 추구하도록 한다. 보편 가치의 예로 사람으로서 갖는 존엄성, 사람답게 살아감, 자유, 질서, 양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정의와 평화는 하나님 형상이 회복된 공동체의 특징적 모습이다. 평화와 정의는 정치적 행동이나 사회 질서의 변화를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이것은 겉으로의 평화와 정의에 그칠 뿐이다. 그것은 언제나 권력이 남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정치 질서는 비록 그것이 기독교적 바탕 위에 세워진 것이라 할지라도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정의가 정치적 질서를 통해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공동체가 정치 질서 곧 평화와 정의로 나타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될 때 실현된다. 이 때 인류는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경험할 것이다.


일곱째,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룬다.

보편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보편 가치를 추구하는 다른 사람과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한다. 하나 되는 공동체의 근거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개념에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은 존재하심과 인류를 위한 계시 및 구원 사역에서 서로 구별되나 통일을 이룬다.


샤르댕(Teilhard de Chardin)과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인류의 발전 특히 인류 역사의 현대적 국면에는 하나됨을 향한 수렴적 흐름(convergent drift)이 있다. 이것의 결정적 조건은 사람이 갖는 ‘반추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사람이 보편적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사람은 자신 안에서 통일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을 뛰어넘어 통일성을 찾으려고 한다. 바로 여기에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공동체가 요구된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현재를 특징짓는 하나됨을 향한 수렴 과정은 지금까지 모호하였다. 그것은 개인과 공동체적 운명 사이에 긴장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개인은 그 자신의 존재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뛰어넘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의 목적은 개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개인과 그들에 의해 대표되는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일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소외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없는 복잡한 상황이다(W. Pannenberg,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66-9).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