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와 빌리 그래함의 부흥 이해[3] / 백주현목사

새벽지기1 2016. 4. 12. 07:28


4. 그렇다면 진정한 부흥이란 무엇인가?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심으로써 그 백성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 하는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것에 대한 일종의 반복이요, 그 기원과 시작할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요, 소생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1) 라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란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것이요,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언뜻 지나치면서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2) 로이든 존스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을 추론하면서 부흥의 내용에 대하여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이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기도도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것으로 그는 부흥을 인위적인 인간의 노력으로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그 백성에 임하심이지 인간적을 노력으로 성취됨이 아님을 보고 있다.


5. 부흥의 성격


로이드 존스는 부흥의 핵심을 성령께서 여러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온 교회에, 특정한 지방이나 어쩌면 온 나라 전체의 여러 교회들에 임하신다는데 있다, 부흥이라는 것은 성령의 방문하심이요, 성령의 부으심이다3)고 말한다.


부흥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의식과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놀랍다는 의식, 다른 사람들도 그 구원을 알기 간절히 바라는 마음등이 부흥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4) 라고 본다.


부흥의 특별한 특징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 부흥을 통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 부흥이 잠시 왔다가 잠시 동안 지속되다가 가버린 다는 것(하나님의 한정된 역사),부흥의 결과로 회심한 사람들은 계속 남는다. 5) 부흥이란 규정상 하나님의 능하신 역사입니다. 또한 주관적인 하나님의 역사이고 독립적인 것이라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의 일6)이다. 전적인 인간적 요소를 배제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더욱 부흥은 사람들이 주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강력하게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며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법칙들을 만들어내고 조건들을 다 지키기만 하면 부흥을 산출해 낼 수 있다거나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 부흥을 자기 손에 쥐고 계심으로 그 부흥의 시작과 과정과 마지막을 다 주관합니다. 그 부흥의 문제에 있어서 모든 것이 다 성령과 그 권능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7) 전적인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리고 부흥을 멈추시는 것도 역시 성령의 주권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부흥은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그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이해하고 기대할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교리나 자세는 부흥을 맛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예가 바로 교회사 속에서 나타나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한 번도 부흥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니테리안(일신론자, 삼위일체를 부정함) 교회에도 부흥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 국교회(성공회)도 부흥을 체험하지 못했다8)고 말한다. 이러한 것들의 특징이 성령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교리와 체제는 부흥을 맛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6.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백성과 교회에 부흥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첫째로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와 같이’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시는 목적은 교회의 복락을 내리시고 그것으로 하나님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엇인가? 하시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가 교회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9) 이다.


두 번째 이유는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에 대한 비상한 의식을 교회에 가르쳐 주는 것(로이드 존스는 그 도구로 설교로 보고 있다10))이다. 이것은 부흥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되 그를 계속 바라보게 하며 그를 의뢰하게 만드는 것이다.11)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 교회와 구원과 연관됨을 강조하고 있다. 즉 교회가 회복되고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오직 부흥의 역사 속에서 회복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7. 부흥의 장애물들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관하여 관심을 두면서 역시 부흥을 가로 막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필역한다. 그래서 이것을 제거하면 부흥이 온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부흥을 가로 막는 것들이 무엇인가?


전체적인 경향에서

그는 개혁신학의 퇴조와 찰스 피니가 쓴 글들의 영향을 들 수 있음을 보면서 그의 캠페인과 집회가 수적으로 성공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그래서 부흥집회가 열리는 것을 피니의 결과들이라고 본다. 그 결과들이 부흥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회의 소집하여 복음전도 집회를 조직하고 광고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인간적인 요소로 전체 시각과 사고의 구조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부흥의 또 다른 장애물은 영적인 무력증입니다. 내면화가 없는 피상적인 마음의 깨우침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는 그것을 진정으로 대면하거나 상황에 진정으로 착수하거나, 난제를 직면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이 많아 너무 바빠서 자신들의 영혼에 큰 해를 줄 정도가 되어 영적인 무력증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12)


그리고 그는 신학교의 문제로 학적인 것에 집중하여 영적인 일에 관심을 덜 기울이게 된 것이 부흥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13)고 말한다.,


그리고 개혁파의 부흥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개혁파 교회와 사람들에게 교회와 신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것 만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고 무미건조한 전통 이지주의에 빠져 자신의 영적 삶과 교회의 삶에 대해 갈수록 태만해 지는 것을 경고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결함이 있는 전통을 말한다. 교리의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지적인 관심, 지성적으로 옳은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 것인데 참된 교리자체를 가지고 그 인격을 살아 있는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오인하는 것과 주로 교리 자체의 입장에서만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인데 이것은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경적인 참된 관점이 부족하고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진수가 되는 교리를 나타내는데도 부족하다는 것이다.14)


더불어 교회에 대한 결함이 있는 교리들입니다. 교리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바르고 정통적이면서도 영에 있어서는 잘못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교만함, 삶의 교만함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자신의 신분을 자랑이고 지식을 자랑하는 것과 비평하는 영, 경쟁심 등등입니다.


다음으로 죽은 정통들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자만하는 태도입니다. 바른 예배와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태도에서 생명과 생명력과 능력 있는 예배가 되게 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그러한 힘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흥분, 거짓된 기쁨의 의식입니다. 다음으로 격한 감정주의, 이것이 일종의 환각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성령을 소멸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오염된 교리는 부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믿음의 결정적 요소를 부인하고 의심한다. 부흥이 방해받는 때의 교리적인 면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추적이고 중심적이지 않으며,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거나, 우리의 묵상과 삶과 생각과 기도가 그 분을 중심에 모시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주의를 대적하는 데 너무도 많은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이라고 보며 변증에 너무도 집중한 나머지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본다. 너무도 이단이나 현대주의에 에너지를 쓰기에 집중하다가 보니 본질에서 약화된 모습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불신이다. 불신에서 그는 자연신론(deism)과 합리주의의 득세와 교회가 본질적인 진리의 부인과 무시 그리고 부흥을 맞이한 공동체에 대한 핍박 더불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무시, 죄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한 태도를 통해서 불신적인 면을 지적한다. 15)


그리고 또한 너무 지나친 감정을 천성적으로 좋아하지 않음으로 신학적 사고로 감정을 믿지 않는 경향 때문인데 이것이 오순절주의와 탈선을 너무도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 즉 어떤 것에 대해 지나친 반응을 보임으로써 성경이 제시하는 평형을 잃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16)


우리 개혁교회가 이러한 부분에서 지성과 감성이 서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는데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교회에 부흥이 오는 것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