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그리스도인의 소망(히 6:11-12)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4. 2. 12:31


그리스도인의 소망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1-12)


6장 본문에는 이 위대한 서신의 요점 부분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요점은 히브리서 전체를 통하여 강론과 권고의 형식을 띤 특별한 서술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기를 열망하며 이를 위해서 그들을 책망함과 동시에 교훈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책망은 사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은로서의 삶에 있어서 균형과 평정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떤 면에서는 매우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는 반면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일면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대등하고도 중요한 또 다른 면에 대해서는 소흘하게 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행위적인 면에 있어서는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친절했고 서로에 대해서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 중에서 지적이고 신학적인 면은 소홀히 했습니다. 그들은 교리적인 분야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5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오신 대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11,12절). 그들이 듣는 데에 둔하기 때문에 자신이 곤경에 처해 있다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 중에서 지적이고 교리적인 면을 태만히 해왔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바를 들을 수 있는 적당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주려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단한 고기인데, 그들은 젖이나 먹을 수 있을 정도인 어린아이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서 말한다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진정한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에 관련된 교훈을 굳게 잡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11절)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등한시하였던 것입니다.

 

정통성 심사


이러한 말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이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켜 보려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균형이 깨어진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이 걸린 주된 문제를 파헤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인가의 여부에 대한 결정적인 시금석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한 결정적인 시금석은 정통성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를 증명하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거쳐야한다고 봅니다. 그는 정통적인가? 그는 하나님을 믿는가?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가? 속죄와 부활과 성령의 인격성을 믿는가?" 물론 우리 모두는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의 정통적이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려면 그는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통성이 중요한 관건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 고백의 결정적인 시금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 정통성의 심사가, 다양한 다른 반응들과 관련해서 논쟁에 오르는 어떤 예비 심사와도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느낍니다. 예를 든다면 웨일즈에서 아이스테드포드(Eisteddfod, 미술축전)가 열리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일종의 예비 심사가 치러져야 합니다. 이 예비 심사에는 아마도 사십 내지 오십 여명 정도의 경쟁자가 선정될 것이고 그 중에서 오직 한 명만이 전체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시상대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예비 심사의 역할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탈락시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고백과 관련해서 정통성의 여부도 일종의 예비심사입니다. 그것은 예비 심사정도에서 그치는 소극적인 차원이지, 그 자체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차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통성심사는 결정적인 시금석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충고해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태도가 완벽하게 정통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복음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까지도 온전하게 변화된 것은 아닌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심사


그리스도인에 대한 결정적인 시금석이 행위의 심사 즉 삶의 심사라고 대답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앙 자세에 있어서는 매우 정통적이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표출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내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그 사람은 과연 선하고 깨끗한 삶을 사는가? 그 사람은 동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가? 그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선을 행하는 주님을 닮았는가? 의 문제라고 봅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다시 한 번 우리는 사람이 선한 삶을 살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의 가치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이 아무리 정통적이라 할지라도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심사는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심사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도의 윤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난을 초월하는, 즉 결코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삶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이런 오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내가 예배에 참석하고 안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선한 사람이기만 하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신약 성경은 이런 견해를 결정적인 시금석으로 삼는 것을 단호히 배격하고 있습니다.

 

경험의 심사


우리들의 질문에 대한 세 번째 응답자는 매우 현대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정통성만으로는 부족하고, 단지 도덕성과 선행만으로도 부족하다는 데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리스도인의 결정적 시금석은, 그는 경험이 있는가? 그는 자기가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에는 보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본다'라고 그는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자기가 생애의 새로운 경험을 한 새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가? 라는 데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일단 경험은 핵심적인 사항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동의해야 합니다. 갑작스러운 것이든 점진적인 것이든 이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탄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각 개인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자기의 삶에 대전환이 있었노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경험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입장을 고수한다면 우리는 매우 통탄할 과오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챤사이언스의 신자도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정신분석학자와 대답하면서도 경험 문제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결정적인 시금석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라는 문제에 어떤 태도를 가지며 또한 어떠한 답변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핵심적이면서도 전체 분야를 포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신약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들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요 14:2-3) 주님께서 이 생각을 제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바울 역시 소망에 관해서 말합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엡 1:18)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의 서신의 첫 장을 읽는다면 그가 이 단어를 쓴 숫자로 인하여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요한의 서신과 요한계시록에서도 역시 중심과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


만약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신앙 고백에 대한 시금석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함께 이 주제에 관련된 많은 혼동이 있음을 알고 이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봅시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기질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듯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지닌 사람은 다정하고 상냥하며 언제나 웃음을 머금은 사람, 즉 낙천주의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그런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단순한 기질상의 문제라거나 낙천적인 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삶을 현실적인 방법으로 대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등을 돌리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거나 또는 매혹적인 어구들로 사람을 흥분시키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까? 저도 소망을 확실성 또는 확신과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자기들은 확신은 할 수도 없고 다만 구원받기를 소망할 뿐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 있어서 소망이란 확신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 본문에 의하면 이것은 정말로 우스운 얘기가 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불확실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우리 앞에 있는 이 소망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이 소망의 교리에 의하면 우리의 구원은 주로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만 우리 구원의 첫 계약금을 받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의 기업에 보증"(엡 1:14)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주로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기업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리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의 권리 증서들을 이미 손에 쥐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소유가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이것이 본질적으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교리입니다. 우리는 단지 계약금을 받는 것뿐이며 첫 열매를 얻는 것뿐이고 완전한 구원은 미래에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그러므로 후사들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있는 위대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교리를 잡는 것이 우리 신앙고백의 결정적인 시금석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삶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만약 누가 이 교리를 믿는다면 그는 정통적임에 틀림없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을 것이 분명하고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은총의 소망의 교리 이외에 이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것이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서신의 수취인들은 그리스도인들로 개종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오래도록 지켜오던 유대 의식들을 포기하고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지 않자 그들은 자기들이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과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기 시작했고 또한 신앙이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이 서신을 그들에게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교리를 굳게 잡고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돌아 갈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안락한 시절을 보내리라고 말한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로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죽일 것이지만 우리에게서 소망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소망을 떠나서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우리의 위로와 위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업의 실패를 직면할 때, 병으로 드러눕게 될 때, 일들이 잘못되어 갈 때에 무엇을 의지합니까? 여러분은 죽음과 맞닥뜨리게 될 때에 무엇에 의뢰합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시며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은 이 영광스러운 소망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이 소망이야말로 위로와 위안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말씀을 덧붙인다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라는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적절한 격려를 줍니다. 이런 식으로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만약에 정통주의라고 말하는 입장을 취하고 정통성만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가리는 결정적인 시금석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이것을 의지한다면, 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질 것이며 아마도 배교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경험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경험을 향해 뒤를 돌아 볼 것이며 따라서 뒤를 돌아보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전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자신들이 겪었던 종교적인 경험들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항상 첫 경험만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이 복된 소망의 교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일한 격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볼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어느 날엔가 들어 갈 그 상태를 생각할 때에, 그리고 영광스럽고 놀라운 구원을 꿈꿀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앞으로 전진합니다. 내 앞에 있는 소망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생을 근면케 하도록 고무합니다.

제 자신도 육체로 있을 때에 행한 행위들을 고백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할 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기억해야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서도 나태하고 무기력한 경향을 띤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주님의 모습 그대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저도 그 때에 가서야 우리의 구원에 위해서 주님께서 어떤 대가를 치루셨는지를 깨닫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분의 은혜로운 얼굴을 대하고 그 분의 손과 발에 난 못자국을 볼 때에 우리는 우리의 누추함으로 인하여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말씀한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제가 어떻게 이 소망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그 대답을 나머지 장에서 제시합니다. 만약 확신하기를 원하신다면 자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는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바랐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이와 같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배경이 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 6:19).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속박을 깨뜨리셨고, 무덤으로부터 승리하여 일어 나셨으며, 하늘나라에 들어 가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시 오셔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여러분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히 6:11)기를 간청합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