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퍼의 시민 불복종 운동의 교회사적 이해]
우리는 두 번의 글을 통하여 시민 불복종운동에 대한 쉐퍼의 성경적이고 철학적인 전제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쉐퍼의 사상에 더욱 확고한 불을 당긴 것은 바로 교회의 역사였다. 쉐퍼에 있어서 교회의 역사는 개혁의 역사였던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의 시민 불복종 운동의 기반을 교회사를 통하여 확고히 하였다. 이제 종교개혁자들과 후예들에게서 쉐퍼의 사상을 만나보자.
1. 칼빈과 베자
칼빈은 정치권력에 있어서 그의 관점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는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는 것이 정당함을 역설하였다. 그 왕이 비록 악한 왕이라 할지라도 복종하는 것이 성경의 요구라고 하였다. 칼빈은 우리의 모습은 절대적 복종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권세자에게 불복종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에 대하여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칼빈은 통치자들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말하고 있는가? 통치자는 그 어떠한 저항도 받을 수 없는가?
이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한국 교회의 가르침은 바로 여기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비록 적극적인 저항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가 침해되는 것을 그 어떤 권세자에게도 허용치 않으심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물론 칼빈은 사사로운 개인들의 저항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칼빈은 헌법상의 관리들은 왕들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뜻밖의 대리자들을 통해서 개입하시는 때가 있다고 하였다. 때로는 강한 어조로 말하기도 하였다. 다니엘의 주해[단6:22절에 대한 30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상의 군주들이 하나님께 반항할 때에, 그들은 그 권력을 포기했으며 사람으로 인정받을 자격을 상실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전적으로 대항해야 한다[직역하면 그들의 머리에 침을 뱉어야 한다]" 쉐퍼는 이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인 베자에게 와서 더욱 분명해졌다. 베자는 명백한 전제 정치는 무력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저지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칼빈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찬탈자에 대한 저항은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주어졌다고 하였으나 베자는 누구든지 저항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베자는 저항할 기회가 왔는데도 저항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고 하였다. 특별히 사회 개혁의 측면에 있어서 군주가 부당한 세금을 강요할 때는 권위 있는 자들이 항의를 한 뒤 나라의 법에 따라 질서를 세울 수 있고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베자는 정부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에게 위임한 신하들 사이에 왕중 왕으로 인정되고 섬겨지게 되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베자는 칼빈이 열어놓은 사회개혁의 저항정신을 분명하게 한 걸음 진보하였다. 이러한 베자의 개혁정신은 셀븐이 지적한대로 1581년의 17개의 화란주들이 스페인의 필립왕에 대한 충성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문서, 미국의 독립선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촉발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그리고 20세기의 대서양헌장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였던 것이다.
2. 청교도인 낙스와 러더포드
대륙의 종교개혁은 섬나라인 영국과 스코트랜드로 이어진다. 성경 밖에서 만나는 성경적인 사람들을 청교도라고 부른다 특별히 이들은 대륙의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오히려 스코틀랜드 특유의 신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이들의 저항운동은 대륙의 그것보다 더욱 과격해졌다는 사실이다.
청교도정신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낙스는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의회에 보내는 상소』에서 종교문제를 다루고 나서 세속권력, 특히 왕권에 대한 저항의 문제를 다루었다. 쉐퍼는 시민 불복종 운동에 있어서 낙스가 가장 좋은 본보기라고 말한다. 왕이 전제[독재]를 할 때 신하들은 "엄한 권고와 충고"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교정하고 억제해야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왕들이 선하든 악하든 우리는 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은 낙스에게는 신성 모독적인 발언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렇게 낙스는 불의한 정권에 대해서 매우 강경하면서 분명한 선을 그었던 것이다. 낙스의 이러한 강경한 저항사상은 칼빈의 사상 그리고 베자의 입장보다 더 진일보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낙스는 어느 누구나 압제하는 독재자에 항거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낙스는 말하기를 불의한 명령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의한 권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자가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 시민 불복종운동의 한 인물로서 낙스를 칭하면서 낙스의 사상은 마틴 루터나 존 칼빈 같은 개혁가들처럼 민중지배자에 대한 거역만을 주장한대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평민들에게도 성경에 위배된 정치를 하는 관리에 대해 거역하고 저항 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주장하였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거역하는 일이 된다고 하였다. 낙스의 저항운동의 결실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확고하게 세워 졌던 것이다.
낙스의 이러한 사상의 흐름은 언약도 운동들 그리고 청교도 사상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인의 사상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사무엘 러더포드의 『왕과법(Lex Rex)』의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었다. 청교도 목사인 사무엘 러더포드는 1600년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태어난 러더포드는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그의 대표적인 책인 『왕과법(Lex Rex)[1644]』에서 낙스의 사상을 뒤이어 개혁주의 사상을 더욱 곤고히 하였다.
러더포드는 1637년 찰스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를 폐지하고 성공회 예배를 드릴 것을 명하자,1644년에 『왕과법(Lex Rex)』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책에서 러더포드는 먼저 정부의 기원과 목적에 대하여 논하고, 정부의 형성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그에 의하면 정부는 인간의 간교한 꾀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고, 권선징악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통치자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권선징악을 시행하므로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를 집행하고, 악한 세력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므로 백성과의 계약을 집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백성과 하나님이라는 계약 대상을 가진다. 백성이 법을 어길 때 법에 의하여 제재를 받는 것과 같이 통치자도 계약을 깰 때에 법에 의하여 제재되어야 한다. 따라서 백성이나 통치자 모두 법에 의하여 권세를 제한 받는다. 만일 통치자가 법을 어겼다면 계약을 파기한 것이므로 백성은 그에게 복종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러더포드의 이러한 개혁 정신은 스코틀랜드는 물론 대륙의 사상도 영향을 미치었으며 특별히 세속 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쉐퍼는 이러한 영향이 현대 앵글로색슨족은 거의 잊어 버렸지만 그의 작품과 그 작품이 나타낸 전통은 미합중국 헌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쉐퍼는 러더포드의 이론에 근거하여 국민들이 부당하게 폭정을 가하는 정부에 대해 저항할 도덕적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개혁주의 자들의 법치주의 사상과 언약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권세에 복종하여야 한다 그러나 불법적인 권세에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청교도들의 사상이다.
3. 화란 개혁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예벨트, 한스 로크마커
이러한 개혁주의 사상은 화란으로 넘어오면서 현실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란의 개혁주의 사상은 아브라함 카이퍼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사상과 실천적인 삶은 화란의 개혁주의 사상에 큰 물줄기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아브라함 카이퍼의 정치적인 삶은 칼빈이 부르짖었던 영역주권의 주장을 현장 속에서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카이퍼의 삶과 사상 이면에는 그의 스승인 흐른 반 프린스턴의 영향이 스며들어있다.
흐룬 반 프린스터[G.Gron van Prinsterer]의 사상은 칼빈이 강조하였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영역주권사상을 실체화하였다. 흐룬의 영역주권 사상은 정치적인 영역도 역시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흐룬의 사상은 당대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거스릴 수 없는 개혁의 가르침은 뒤이은 개혁자들에 의하여 부활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M.R. Langley는 흐룬의 개혁사상은 카이퍼와 바빙크 그리고 스킬더 메이첸,반틸,쉐퍼,로크마커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었다고 하였다. 정성구는 쉐퍼의 문화의 세속화에 대한 기독교적 비평은 바로 흐룬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보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남긴 사회 개혁자로서의 유산은 M.R.랑홀레이가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듯이 사회개혁을 위한 좋은 통찰을 주고 있다.이 역시 쉐퍼의 활동 속에 베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경건의 연습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국가의 직무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당대의 실천적 개혁주의 사회개혁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정당, 교육, 대중매체 그리고 예술과 학문의 분야에까지 하나님의 전 주권을 분명히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의 후계자인 도예벨트를 통하여 확고히 됨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뒤를 이어 전통적인 개혁사상가로서 기독교 철학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던 기독교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헤르만 도에벨트[Herman Dooyeweerd]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현대 개혁주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우주 법적 이념철학을 통하여 칼빈으로부터 이어오던 영역주권에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사상을 이론화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쉐퍼가 직접적으로 헤르만 도예베트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쉐퍼의 서구사상에대 한 이해는 도예벨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헤르만 도예벨트[Herman Dooyeweerd]는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한 이로서 이 분야에 있어서 가장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분야였다. 그는 국가를 역사문화적인 양상속에 그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권력이 역사를 통하여 형성되고 체계화되며 배분되는 과정속에 생겨났다고 보았다. 이러한 국가 권력의 특징은 "칼"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합법적 의무를 저버리고 국가에 대항하는 어떠한 무장된 시민조직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결국 국가의 기초기능은 제한된 영토내의 특정한 문화영역에 대하여 내부적이며 독점적인 방법으로 칼의 힘을 행사하는 것속에서만 발경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도예벨트는 이러한 국가의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결코 마키아벨리식의 무제한 권력의 힘을 말하지 않는다. 도예벨트는 국가의 기초기능인 국가권력을 인도하며 개혁 시키는 것은 국가의 법적 기능이라고 하였다. 법이 인도기능을 가지지 못하는 나라는 국가가 아니라 깽단이나 도독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국가는 공공의 법으로 조직된 정부와 국민의 연합체라고 규정하였다. 결국 국가는 권력을 가진 존재이나 그 국가는 규범된 법의 테두리안에 있어야 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예벨트는 진정한 국가는 국가의 절대화와 개인의 절대회로부터 철저하게 결별한 사상만이 건전한 법치국가 사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앞서 살펴 보았듯이 사무엘 러더포드의 법치주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헤르만 도예 벨트[Herman Dooyeweerd]의 사상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 예술사분야의 뛰어난 학자이며, 프란시스 쉐퍼의 절친한 한스 로크마커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스 로크마커[H.R.Rookmaaker]는 단순한 미술사 교수에 국한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브라함 카이퍼 박물관의 관장이며 철저한 개혁주의 전통에 서있는 인물인 것으로 잊고있다. 그는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modern &the death of a culture]에서 예술 분야의 모습을 통하여 현대 세계를 조명하고 그러한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첫째 우리는 자유를 수호하는 편에 서야한다. 둘째는 인간성 수호의 책임 또한 우리의 몫이다. 셋째는 이 시대를 비판하는 것 또한 우리의 소명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체제 유지 자체를 위해 존립할 뿐인 기존 질서에 편승하거나 순응하는 의미에서 보수적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비판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저항해야 할 곳에서 저항 할 줄 아는 것 또한 우리의 소명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저항의 정신은 사랑으로서 해야함을 말하였다. 화란 개혁주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의 분야에서 개혁주의 사상을 보여준 한스 로크마커와 프란시스 쉐퍼와의 만남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던 것이다. 쉐퍼의 사회 개혁사상에는 이렇게 놀라운 사상적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선언}에서 놀라운 지적을 하였다. 그것은 개혁주의[칼빈주의]가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들-미국, 영국, 스위스, 스코틀랜드, 프랑스, 화란, 덴마크-에서는 17-18세기에 예외없이 폭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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