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을 오용하는 방법
우리는 지금까지 15주에 걸쳐서 십계명의 말씀들을 상고했습니다. 자,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결론은 “십계명을 잘 지키자”입니까? 이렇게 단순하게 내는 결론이 바로 십계명을 오용하는 길입니다. 소위 율법주의입니다. 여러분이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생각하시면 율법주의가 가장 좋은 길입니다. 율법주의는 말하자면 공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신앙을 가장 단순화시킨 형태입니다. “하기만 하면 된다”가 율법주의입니다. 내 할 일만 하면 나는 편해지는 겁니다. 율법을 오해하고 오용하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그렇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십계명을 벽에다 써놓고 매일 외우고 하나씩 하나씩 실천하기로 작정하고 만족스러울만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십계명을 오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연기가 가득하고 불붙는 시내산에서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선포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그들이 “떨며 멀리 서서”라고 말합니다(18). 십계명 또는 율법은 그렇게 단순하고 쉽다는 인상을 결코 주지 않았습니다.
2.율법/십계명의 한계
우리는 여기서 율법과 십계명의 한계를 봅니다. 결국 백성들이 보인 반응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애굽의 장자들이 죽고 그 울음소리가 온 애굽을 진동하였습니다. 그날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불과 3개월 전,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던 순간도 기억했겠지만, 지금 그들이 가진 두려움만한 두려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도 죽지 않고 산 민족입니다(신 5:26).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았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계를 정해주시고 산으로 올라오면 죽는다고 하시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그 불붙고 연기나는 산으로 올라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멀리 서 있었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처음에는 산 가까이에 모여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 가운데서 십계명이 선포되는 것을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산에서부터 점점 한 걸음씩 뒷걸음을 쳤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너무 무서워서 제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게 하고 모세가 대신 듣고 전해달라고 말합니다. 약 40년이 지나 모세는 이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명기 5:24~27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번만 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을 것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본문 19절과 같습니다. 이것이 십계명 혹은 율법이 가진 한계입니다.
A.율법은 두려움을 낳는다.
율법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죽을 수 밖에 없다고 느끼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이 십계명의 말씀을 하나씩 들었을 때 그들을 두렵게 한 것은 단순히 그 음성과 광경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이며 그들 자신이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께 철저하게 충성하라는 요구라는 것을 그들은 이해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십계명이 의미하는 내면적 요구나 적극적 의미 등을 다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이것이 자기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라는 사실은 안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출 19:8)? 율법은 이런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읽고 듣는다면 그 내용으로부터 두려움을 얻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B.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다.
그러나 이들이 두려웠던 것은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느꼈듯이 단지 율법의 내용만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이었고, 여러 가지 무서운 소리들을 들었습니다. 연기와 흑암이 산 전체를 둘러싼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보고 경험한 현상은 마지막 심판날에 있게 될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현현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여기 처음 나오는 장면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십계명을 주시기 직전에도 이 두려운 광경에 대한 성경의 묘사가 있었습니다(출 19:16~19). 그러니까 이 광경의 묘사가 양쪽에서 십계명을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계명이 들려지는 그 모든 시간 동안, 바로 이 광경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여러분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기가 보았던 ‘빛의 광채(영광)’을 인하여 그는 땅에 엎드러졌었고 결국 눈이 멀고 말았던 일을 기억해보십시오(행 22:11). 사도 요한이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만나 그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앞에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진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백성들의 두려움은 바로 율법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3.그래서 중보자가 필요하다.
백성들이 그래서 요구한 것은 바로 중보자였습니다. 마치 법적 문제에 휘말렸을 때 우리가 직접 법적인 전문지식을 가지고 법정에서 서서 판사 앞에서 자신있게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변호사를 필요로 하듯이 백성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보자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일은 잘 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잘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알아야 했고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죄인이 직접 상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이 일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5:28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신 5:28).”
하나님은 여기서 그들이 요구한 것이 옳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들은 중보자가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의도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워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20).” 신명기 5:29도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이 설명에는 율법의 기능과 목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이라는 율법의 내용 뿐 아니라, 이 율법을 주시는 방식 또한 십계명 혹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율법의 목적
A.죄를 억제한다.
먼저 생각할 것은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란 말입니다. 범죄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십계명이고 율법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이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이루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다가는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 무서운 광경의 경험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신 5:29). 그러면 범죄치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첫번째 기능이자, 목적입니다.
B.은혜를 필요를 느끼게 한다.
두번째로 생각할 말씀은 “너희를 시험하고”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시험하십니다. 시험한다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연단하신다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그들 앞에 두심으로써 그들이 불순종하여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고, 자기가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켜드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은혜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가 필요한 존재다”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절대로 복음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C.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가르쳐준다.
셋째는 이 모든 말씀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따라서 살아가는 백성이 되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의 본문에는 아주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삶으로써 영원히 복을 누리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입니다(신 10:13). 이것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후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십계명 곧 율법의 세번째 기능과 목적입니다. 이것을 교육적 용도라고 말을 합니다.
5.중보자 모세의 한계
모세는 백성들이 원한대로 중보자로서 행동합니다. 백성들은 여전히 멀리 서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감히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들어갑니다(21). 이제 우리는 구약 성경의 시대에 가장 탁월한 중보자의 위치를 감당했던 모세를 보게 됩니다. 그는 24장으로 가서 보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언약을 체결하면서 희생제사를 드린 후에, 그 피, 속죄를 상징하는 피를 백성들에게 뿌립니다(출 24:5~8). 백성들의 두려움은 모세를 중보자로 구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옳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라는 탁월한 사람을 그들의 중보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비록 모세는 탁월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했지만, 그도 역시 죄인이었고, 범죄한 사람이었습니다.
6.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우리는 모세 이상의 중보자를 필요로 합니다. 더 나은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지 모세라는 사람 자신의 부족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와 함께, 율법 자체가 가진 한계 때문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두려움을 더해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운 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알지만, 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중보자가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멀리 서서 두려워 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모세 보다 나은 중보자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중보자는 오직 한 분 뿐입니다(딤전 2:5~6). 그분은 모세보다 나은 분입니다(히 3:3; 8:6). 모세는 율법을 범했지만, 주님은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습니다(히 10:7).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완전한 중보이십니다. 율법의 완전한 의로운 요구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엄중하심 때문에 우리는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완전한 중보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가 되시기 위해서 율법의 그 의로운 요구를 완전하게 순종하셨고,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십자가에서 다 지불하셨습니다. 우리의 중보가 되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에게는 이 십계명, 율법이 무용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율법의 정죄하는 권세 아래 있지는 않지만, 율법의 명령하는 권세 아래에는 놓여있다.”
7.성도는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경험하고 지킨다.
주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영원한 기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의식법과 시민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우리의 숙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계명으로 불리우는 이 율법이 우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관건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그가 거듭났는가, 그가 회심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이 십계명은 여러분들을 더 이상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도리어 자유하게 하는 법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 ‘온전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취된 율법, 복음과 함께 오는 율법을 말하는데 이때 율법은 더 이상 성도를 구속하여 죄의 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자유케 하는 율법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데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만 섬길 자유를 얻은 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인적 증오로부터 건짐을 받았고 그래서 이제 용서할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제는 성령의 순결하심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성도는 이미 자기의 모든 거짓이 드러났기에 이제는 참 진리를 말할 자유를 얻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기에,
이제 자기 힘으로 살거나, 훔치거나 탐내는 삶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말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이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 되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이 계명을 지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요 14:21).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드러내고 싶어서 순종합니다. 청교도 새뮤얼 볼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여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 복음은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로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우리를 다시 율법으로 보낸다. 율법은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우리를 복음으로 보내고, 복음은 다시 우리의 삶의 길을 형성하도록 율법으로 우리를 보낸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의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이 십계명이 없이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 십계명과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가 중보자를 간절히 필요로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중보자를 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까?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나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십니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십자가로 나아가는 유일한 문입니다. 이 십계명을 여러분의 집에 액자로 달아놓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이 모든 계명을 아무 흠도 없이 완벽하게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 계명에 드러난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살기를 구하십시오. 매일 이 계명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흐르는 강으로 인도하시기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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