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필승 코리아, 2006년 월드컵 필승 기도회’
며칠 전 아침 유럽 크리스챤 한인신문의 전면을 장식한 이 요란한 기독교 광고를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히 한 교회에서 그저 하는 이벤트성 기도회가 아니라 유명한 부흥강사를 모시고 독일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프랑크프루트 메인 스타디움에서 개최되는 ‘거국적’기도회라 더욱 그러했습니다. 새로운 화제거리를 찾는 매스컴의 특성상 이 기도회가 교회주관으로 열린다는 유별난 사실이 해외 토픽감으로 보도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축구 외에 얼마나 많은 운동종목을 위해, 앞으로 교회가 기도회를 가져야 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크고 작은 사회문제로부터 운동경기의 승리까지 세상의 ‘모든 짐’을 기꺼이 떠맡고자 하는 교회의 선한 동기야 이해되지만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종국적으로 교회의 고유한 존재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언젠가 어느 한 중진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타켓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라는 화두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긴급한 질문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설교를 통하여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오늘날 긴급한 질문이 없음을 전제하면서 현대의 가장 큰 비극 중 한 가지는 복음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관해 깊은 혼란 속에 빠져 있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더욱 혼란스러운 사실은 이러한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이 주로 교회 그 자신이라는 사실임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본질적으로’ 기독교는 이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개혁하는 것이나 혹은 고상하고 긍정적인 인생에 도움을 주는 그것이나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한 종교생활, 혹은 행복해지거나 병을 낫기 위해 믿는 어떤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또한 기독교는 단순히 정치에 적용해야 할 도덕적인 행동도 아님을 지적합니다. 그는 만약 기독교가 단순히 철학이나 정치적 이념에 불과하다면 아무도 이를 믿을 의무가 없을 것임을 역설합니다. 그저 이 사람은 이것을 믿고 저 사람은 저것을 믿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로이드 존스는 교회가 무엇이며, 기독교가 무엇인지 바로 알기 원한다면, 이천년을 거슬러 올라가 처음으로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무엇을 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권위를 가지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이며 교회는 이런 일을 해야 한다’라고 선언한다면 ‘그것이 교회가 태동한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가?’라고 물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곧 사도 누가가 기독교와 예수에 관하여 데오빌로에게 보고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단순한 인간 소원의 성취나 행복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물이요,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곧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바가 아니라 바로 사실들(facts), 곧 예수라는 인물께서 행하신 일, 그것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로이드 존스는 우리가 먼저 주목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행한 일임을 강조합니다. 물론 양자가 반드시 같이 가야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보듯, 교회는 먼저 예수의 행하심, 곧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집중함을 강조합니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기독교는 우선적으로 사람들이 구원받아야 하며,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주셨다는 하나님의 행동이요, 메시지입니다. 곧 기독교의 메시지는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말해주는 그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행전을 통하여 보아 알 수 있듯,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성령이신 하나님을 통하여 행해지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와 사도들의 설교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그들의 주요한 임무는 그분이 행한 일들에 대한 증인(행1:8)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로마 제국 전체를 흔들어 놓은 것은 그들이 전한 것이 정치사상이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개선의 메시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죽인 바로 그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바로 그 복음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유효한가?
로이드 존스는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기독교 복음을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도덕적 적용, 혹은 다른 사회운동이나 사람을 즐겁게 하는 종교 버라이티쇼와 같은 심리적 요소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그는 고대세계와 달리 과학과 의학, 교육의 진보와 또 다른 정치적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오늘날에 케케묵어 보이는 기독교와 복음이 여전히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대응합니다.
첫째, 인간자신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은 고대인과 달리 선진화된 자신의 지식과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을 자랑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인간환경의 외적변화에 불과하며, 하나님 앞에 죄인된 인간의 정황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곧 고대인이 시간당 4마일을 가고 다른 현대인은 동일한 시간에 수십 배의 빠른 속도로 간다 할지라도 인간의 정황과 죄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도 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곧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의 속성 또한 동일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인간 자신도 아니며 피상적 행복도 아니며, 궁극적으로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강조합니다.
셋째, 복음은 인간의 상황과 문제를 가장 잘 처리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특히 복음주의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해 실패했다는 비난은 역사의 사실에 무지하거나 의도적으로 그런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강조합니다. 곧 그는 지난 교회사를 통하여 존 웨슬리나 조나단 에드워드의 삶에서 보듯,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과 영적 각성이 있었던 시기가 음주, 도박, 부도덕, 이혼 등 죄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이 그 어떤 사회운동보다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졌던 시기임을 강조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교회의 우선적이며, 고유한 임무는 사회와 인간의 병의 ‘증상’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병의 ‘근원’을 치료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곧 교회는 표면적인 ‘죄행’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죄의 ‘근원’을 치료합니다. 만약 그가 복음 자체가 가지는 생명력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진다면 기독교가 외치는 복음과 영혼구원은 비사회적이라기보다 어찌보면 더욱 사회적이며, 더욱 근원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반드시 삶의 전인적 변화를 가져오며 궁극적으로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오늘날 교회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지고 세력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회적 영향력이 감소한 것은 세상에서의 교회의 파워나 정치적 세력이 약해서라기보다 복음이 가진 그 영광스러운 능력에 대한 피상적 이해와 교회의 순결함의 결핍으로 인한 교회의 ‘참된 권위’의 상실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상의 유일한 소망, 교회
로이드 존스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진리이며, 오늘 교회는 사도행전의 ‘그 교회’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하는 ‘주요한 메시지’는 ‘긍정의 힘(Your best Life on)’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이며 사람의 감정과 증상을 일시적으로 치료하고 위로하는 ‘심리학’이 아니라 근원을 치료하는 ‘그 복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하는 리더쉽은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세상 ‘CEO의 리더쉽’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그 리더쉽’ 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오늘 이 불확실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복음만이 타락해져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희망이며, 이 위대한 복음을 가진 ‘그 교회’야 말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임을 확신하는 것임을 역설합니다. 마지막으로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회의 고유하고 영광스러운 사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찼던 조지 휫필드를 인용하며, “그가 설교할 때에 거의 변함없이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 역설하면서 오늘 설교의 후예들에게 가슴으로 조언합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정죄 아래 있으며, 꾸짖음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나는 내 자신이 꾸짖음을 받아야 한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왜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과거의 위대한 설교자들이 그렇게도 자주 그러했던 것처럼 감동받지 않습니까? 진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그 진리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것에 의해 겸허하게 되며 감격함으로 마침내 놀라움과 사랑과 찬양에 푹 잠기게 됩니까?”(손동식 목사 활천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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