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6:66-68)
그리스도나 종교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공공연하고도 명백하게 선언하는 것과 그릇된 동기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 중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더 위험한 것인지를 밝혀 보려고 하는 것이 제게 있어서는 언제나 흥미롭고도 유익했다고 느끼는 바입니다. 저는 우리의 모든 신학자들이 결국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즉각적으로 말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릇되고 잘못된 동기로 인하여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이나 그리스도를 추종하려는 의도를 전혀 갖지 못한 사람이나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전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릇되고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있는 어려운 문제는, 그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까지도 속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며 또 어떤 말을 해야할지를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이 종교인이라고 자처할 경우에 교회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 사람이 종교인이라고 자처하기 때문에 또한 기독교인일 것이라고 가정해 줍니다. 이런 사람이 처하는 가장 위험한 장소들 중의 한 곳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장소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마는 교회의 이와 같은 현재 상태는 인간적인 견해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실례인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의 회원과 진정한 제자를 하나로 여겨 왔고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 모두를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해 왔습니다. 교회가 그런 식으로 해온 아주 중요한 동기를 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교회라는 안식처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 매우 선한 일이라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당연하게 인정하기 때문에 교회는 신앙의 본질이 결여된 채 그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교회가 매우 위험한 지역일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교회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마땅히 답변할 수 있어야만 하는 근본적인 몇몇 질문들에 대해 답을 못하게 되고, 또한 질문조차 받을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릇된 동기들에 의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될 수 있는 실제적인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것이 매우 실제적이고도 큰 위험이라고 주저 없이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이런 저의 결론에 대한 정당성을 증거해 보이라고 하신다면 저는 신약 성경 내의 여러 장들을 통해 손쉽게 증거해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릇된 동기를 가진 그리스도인들
복음서에 기록된 우리 주님의 생애의 역사를 읽노라면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하는 것아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들이 그릇된 동기에 의해서 자신을 좇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신 점입니다. 사람들이 올바른 동기로 자신을 추종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여러분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올바르고 진실한 것들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지 않는 사람들을 가까이 아니하시려고 주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셨기 때문에, 생애 막바지에 가서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셨을 때에 너무나도 놀라셨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견해는 우리가 신약 성경의 묘사에 의해서 알고 있는 그리스도와는 다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런 가능성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예고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실 때마다 매우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종국에 가서는 발생하게 될 일을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산상보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 하신 놀라운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모두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이 올바른 줄 알았는데 그날에 가서는 모든 것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또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에 관한 비유를 기억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9).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단지 25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진리를 진정으로 붙잡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고기 잡는 비유를 또한 제시하고 싶습니다. 이 비유에 의하면,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 그 중에는 일부는 좋은 고기였고 일부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나쁜 고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에 대한 가장 완벽한 묘사는 아마도 누가복음 9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세 장면 중 하나에 나타날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예수님께로 달려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57절).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찾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런 사람을 대환영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절). 그리스도께서는 이 열성분자를 향하여 돌아서서, 본질적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지금 열광해 있고 흥분해 있고, 또 열정에 사로 잡혀 있다. 그러나 잠깐 멈추어라. 너는 나를 따라 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냐?"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추방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생애에서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확인하십시오. 복음서를 읽노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그릇된 동기에 의해서 자기를 추종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계하시면서 계속해서 경고하셨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신서의 저자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이 메시지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동기에서인지 아니면 그릇된 동기에서인지 시험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이 마지막 질문을 저는 본문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요6:66). 반면에 열두 명은 남았습니다. 떠나간 사람들은 많고 남은 사람들은 적습니다. 그릇된 동기에서 예수님을 좇은 사람들은 많고, 바르고 진정한 동기에서 예수님을 좇은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갖는 잘못된 동기들 몇 가지를 고찰하여 봅시다.
주님 주변에 모여든 군중들을 본 것 때문에 주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교회에 소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과 교회 역사 속에서 상당히 많은 군중심리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군중에게 언제든지 영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언제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매혹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주위 다른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서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가는 것이 보기에 좋았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왜 교회에 와 있지?" 그들로서는 그저 교회에 오는 것이 그냥 옳은 것으로 생각될 뿐입니다. 그들의 부모들과 조부모들도 교회에 다녔고 교회에 다니는 것은 그들의 마을의 전통이고 다른 이웃들도 교회에 다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저 조류의 흐름에 이끌려 가는 것뿐입니다.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아무 의식 없이, 즉 진정한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데에 대한 문제 의식이나 그 의미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이 그냥 교회에 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금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그릇된 동기 중의 다른 하나가 요한복음 6:26의 주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순전히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동기에 의해서만 주님을 좇고 있다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사실은 초자연적인 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님을 따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그 것, 즉 빵을 주님으로부터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양식을 얻고 싶어했고 바로 그 육적인 동기로 인하여서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소속하는 매우 일반적인 동기가 도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알기론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얻는 어떤 신분이나 지위나 권력이나 또는 영향력들로 인해서 교회에 소속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들의 사업이나 직업에 유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소속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얼마나 슬픈 일 인지요! 그들은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들의 사적인 유익과 욕망을 더 많이 챙기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던 빵을 얻어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목록에 아마도 죄사함의 교리만을 믿고 싶어서 즉 영원한 형벌을 피하고 싶은 이유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용서를 공포하십니다.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추종합니다. 그들은 거룩을 바라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지옥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들의 죄를 가리는 덮개로만 사용합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목적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 세상의 구세주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표적을 보고
신약 성경 중에는 우리가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요한복음 6:2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요한복음 2장에서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23절).
이와 같은 사람은 종교의 외형에 더 관심이 많으며 현실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교의 진리보다는 종교의 현상에 더 흥미를 느낍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분을 따릅니다.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능력이 그들을 혹하게 한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곳이면 그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되 매우 신중하게 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기적들을 행하신 목적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라는 인물 자체보다 그가 행하시는 기적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 즉 능력보다도 현상에 더 치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의탁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죄투성이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을 행하시며 여전히 사람들의 생애를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된 영광스러운 현상들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기적들을 행하시고 능력 있는 일들을 이루시고 그래서 자신의 능력만을 과시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우선적인 이유는 선한 일을 사모하는 특별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모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시려고 오셨으며 우리에게 진리의 지식을 전달하여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유가 오직 진리 자체의 현상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은 요한복음 6:14,15에 등장하는데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여기 나오는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메시지 내용을 전적으로 오해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르게 된 재미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본 기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일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며칠 동안, 어쩌면 몇 주 동안이나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는데 단지 그들이 기적을 보고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다. 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 말할 때만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공모하면서 예수님께로 접근하여 억지로 끌어다가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홀로 산으로 물러 가셨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하늘나라를 정치적인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정치적인 해방자로서 오셔서 그들을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구출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왕이 되셔서 그들의 원수들을 다스리고, 나아가서는 온 세상을 지배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께 접근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거절하셨는데, 결국 이로 인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떠난 부류의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선동가나 사회 개혁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늘나라를 무엇보다도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이 세상의 사회적 상황을 처리하며, 세상의 여러 가지 부서들과 직업들의 역할을 대신하며, 또한 산업과 정치와 국제 관계 업무들과 관련된 커다란 문제들을 풀어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그와는 달리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오긴 했지만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인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접근하지도 못할 정도로 연약해서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가냘픈 갈릴리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스도를 위대한 예술가나 위대한 고행주의자나 또는 비할 데 없는 철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분의 책을 단순히 문학적인 보고(寶庫) 정도로만 인식하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교회에서 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제거해낸다면, 그 후에 얼마나 남게 될는지 의문입니다. 경고 받을 부류에 속하게 될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제자도의 심사
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까?"라고 서슴없이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을 대면한 일이 있습니까? 제가 언급했던 본문 속의 그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며칠 동안이나 그리스도를 따랐고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 중의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릅니까? 우리들은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릇된 동기들 중의 하나에 속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올바른 동기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시몬 베드로가 말한 위대한 말씀에서 발견됩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7-69).
우리는 이 답변으로 인하여 매우 만족해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열 두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보는 대로 저들은 떠나간다. 저들은 너희가 들은 바로 그 강론들을 들어왔다. 저들은 너희가 본 바로 그 기적들을 보아 왔다. 너희와 저희는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너희들도 저희와 한 가지로 가려느냐? 너희들도 저희들이 가졌던 것과 동일한 동기로 나를 따라 왔느냐? 만약 그렇다면 나는 너희들로 인해서 기쁘지 않다. 너희들도 역시 가려느냐?" 그런데 시몬 베드로가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답변 속에는 더 이상 삭감할 수 없는 최소한의 그리스도인의 제자도가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답변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분석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분석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라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감정적인 것으로만 봐야 할까요?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맛볼 수 없었을 멋진 기회를 누려왔습니다." 이 말이 감정적인 연모의 정만을 담은 것이었습니까? 그렇습니까? 그것은 감정적 연모심을 품은 답변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보다 한층 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심오한 신앙의 정의였습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하고 물은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래 전부터 무기력한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 이외에 그 누군가가 자기를 구원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단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만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고백한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또한 다른 사람도 저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근본적인 기독교 신앙고백에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선언이 언제나 담겨 있습니다.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의탁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대신할 만한 그 어떤 대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음과 영원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무엇을 의뢰합니까?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이 더 나아지고 진보하리라는 미혹에 빠져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아직도, 단지 지적인 학식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기에 적당하게 해 준다고 어리석게도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베드로는 말합니다."저는 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저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세상도 저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주님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몬 베드로의 위치에 서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파탄과 죄악성을 깨닫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께 말씀드렸습니까?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맹세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베드로는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추종했던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 강론들 중 한 강론에서 자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자신은 '산 떡'이며, 사람이 자기의 떡을 먹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결코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중의 다수가 말하기를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말씀으로 인하여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공식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라고 사람들은 물었고 실족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이것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여, 우리가 구주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그의 행하신 표적들을 믿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그분의 찢겨진 살과 흘려진 피를 통해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만이, 우리가 그분을 진정으로 그리고 진실 되게 추종하는 것입니다.
"나는 대속의 교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알 수가 없어요. 그것은 신비롭기도 하고 심지어는 비현실적이기도 합니다"라고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그 전부를 이해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몬 베드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채찍에 맞아 찢기셨습니다. 그 십자가와 채찍은 바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과거의 죄로부터 구해 내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와 오염으로부터도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앞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으라. 너희도 가려느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났습니다. 이 세상은 점점 신앙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적인 자긍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 모두 주님께로 향하여서 시몬 베드로와 함께 고백하지 않으시렵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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