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소중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비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지극히 강인한 것 같은데 한없이 연약하고, 한없이 연약한 것 같은데 지극히 강합니다. 특별히 자기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기 보호 본능이 아주 강합니다. 미물인 개미들도 자기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단체로 활동합니다. 모기도 잡으려고 하면 날아갑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합니다. 쥐도 막다른 상황에 몰리면 고양이를 공격합니다. 사람도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저도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위대하고 신비한 것은 생명이고, 그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생명의 본능입니다.
특히 모든 생명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 없이 잉태된 생명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세계를 보십시오. 모든 생명 현상에는 사랑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과정부터가 그렇습니다. 모든 생명은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싹튼 사랑으로 잉태됩니다. 잉태되는 과정에 사랑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또 사랑으로 잉태된 생명이 자라는 과정도 온통 사랑입니다. 개나 돼지도 새끼를 키우는 걸 보면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키웁니다. 새도 새끼를 키우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다합니다. 벌레를 잡아다가 새끼 입에 쏙 넣어주는 걸 보면 정말 감동적입니다. 이처럼 모든 생명은 사랑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의 생명이 있습니다. 또 사랑이 없으면 생명은 자라지 못합니다. 사랑은 진실로 생명의 조건이고, 생명의 본질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도 거기에 사랑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16). 하나님은 사랑 없이 존재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랑 없이 행하신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그분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런데 과연 말씀뿐일까요? 말씀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작용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신 분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창조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세상을 창조하신 걸까요? 사랑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사랑의 소통을 하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이 창조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끝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세상이 존재할 이유도 사실상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분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마땅히 사랑의 세상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충만한 세상, 사랑으로 작동하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사랑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어떠합니까? 사랑이신 분께서 사랑 때문에, 사랑으로, 사랑을 위하여 창조한 세상이니 만큼 빈틈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사랑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빈틈이 많고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왜 이렇게 빈틈이 많고 부족한 것이 많은 걸까요? 죄 때문이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와 상관없이 모든 생명은 불완전합니다. 모든 생명은 자기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생명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게끔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늘이 있고, 물이 있고, 태양이 있기 때문에 장미가 살아있는 것이고, 장미가 살아있기 때문에 다른 생명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계시기에 내가 있는 것이고, 농사짓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옷 만드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옷을 입는 것이고,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있기에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와 너, 나와 우리, 나와 우주 사이에는 생명이라고 하는 깊은 연대의 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도 생명의 끈이 작용하고 있고, 나와 우리 사이에도 생명의 끈이 작용하고 있고, 나와 우주 사이에도 생명의 끈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끈이 끊어진다면 그 순간 모든 생명은 죽습니다. 태양이 없어도 생명이 죽고, 물이 없어도 생명이 죽습니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노력도 필요하지만 자기 노력만으로 사는 건 아닙니다. 너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나’라는 존재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생명의 씨줄과 날줄이 얽히고설킴으로써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개개의 생명은 완전합니다. 파리, 모기, 개, 고양이, 고래, 사람은 하나의 생명으로써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간이 개발한 어떤 기술로도 생명 안에 있는 바이오 시스템을 모방할 수 없을 만큼 모든 생명의 시스템은 완벽합니다. 신묘막측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명은 불완전합니다. 어떤 생명도 홀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기 혼자로서는 절대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생명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생명을 불완전하게 만드셨을까요? 왜 다른 생명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도록 만드셨을까요? 단세포 생물, 연체동물, 척추동물, 포유류, 양서류가 갖고 있는 생명의 특성을 다 갖고 있는 하나의 생명을 왜 안 만들었을까요?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생명을 불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모든 생명이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연대의 끈이 없이는 어떤 생명도 살아갈 수 없는 사랑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생명을 불완전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만일 개개의 생명이 완벽하게 존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생명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의 생명 안에 모든 생명의 기능이 다 담겨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의 세상이 될 수 있을까요? 생명끼리 서로 소통과 연대를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완전하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혼자의 힘으로도 능히 생활을 완벽하게 꾸려갈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할까요? 만일 우리 각자가 완벽하게 존재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사랑조차도 필요를 느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필요치 않은 세상이 과연 하나님의 세계일 수 있을까요?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사랑이 필요치 않은 세상이 과연 하나님의 세계일 수 있을까요? 그런 세상은 하나님의 세계일 수 없습니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 사랑이 소통하지 않는 세상은 하나님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이 작열하는 세상이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 세상, 사랑이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을 불완전하게 만드셔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불완전한 것은 인간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랑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그 방법 외에는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은 사랑의 세상이 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잊을 수 없는 영화중에 [제8요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세일즈 강연자로 성공한 주인공 해리와 정신지체아(다운증후군) 조지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해리는 사회적으로 성공은 했지만 너무 계산적이고 차갑고 일에 빠져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내와 딸이 지쳐 남편을 떠났습니다. 이혼한 것은 아니지만 별거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조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10대 소년입니다. 장애인이라는 편견 때문에 끝없이 거절당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골칫거리로 내동댕이침을 당해야 하는 조지,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조지가 해리의 뒤틀린 삶과 가정의 평화를 회복시켜줍니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날과 연결시킵니다. 신은 첫째 날 태양을 만들었고, 여섯째 날에는 사람을 창조했고, 일곱째 날에는 쉬기 위해 구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빠진 것이 없나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빠진 게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여덟째 날에 장애를 가진 조지를 만들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조지를 만들고 나서 영화는 마지막 한 마디를 자막으로 보냅니다. “신은 보기에 참 좋았다.” 저는 영화의 마지막 한 마디가 가슴에 깊이 남았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이 한 마디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꼬 반 도마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장애인은 사회의 천덕꾸러기나 삶의 훼방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최후의 작품이라는 것, 장애인이 없는 사회보다는 장애인이 있는 사회가 더 완전한 사회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는 하버드대학교 교수 자리를 내놓고 장 바니에가 설립한 라르쉬(정신 장애를 가진 자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에 들어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거기서 그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아담이라는 장애인을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됩니다. 난생 처음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맡은 헨리는 아담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 난감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점차 자기가 아담을 돕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자신의 선생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헨리가 아담을 통해 위로를 받고, 세상이 말해주지 않은 가르침을 아담을 통해 듣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라르쉬 공동체의 고백을 담은 헌장에는 이런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보통 환영, 경탄, 자발성, 솔직함이라는 자질을 소유하고 있다. … 그들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우리 마음에 없어서는 안 될 가치를 기억하게 해주는 살아있는 신호이다.”
그렇습니다. 장애를 가진 자들이 근원적인 것을 기억하게 하는 살아있는 신호라는 것은 결코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커다란 부족이 커다란 사랑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놀라운 진실입니다. 제가 일생을 통해서 가장 커다란 사랑의 사건을 경험한 것도 제가 가장 깊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간경화로 인해 죽음의 위기 가운데 빠져있을 때 아들이 저를 살리겠다고 나섰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들에게 조언하지 않았지만 아들은 자청했습니다. 스스로 자기 몸을 찢었습니다. 자기 간의 절반을 떼어냈습니다. 저는 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 저것이 바로 사랑이구나!’ 하는 것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사랑의 맨얼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깊은 곤궁에서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년 전 예루살렘의 십자가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 벌어졌습니다. 죄 없는 분이 죄인을 위해 죽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에 죽었습니까? 인간이 절망적인 죽음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먹고 마시며 비참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 생명이 죽음에 잡아먹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온 생명이 죽음에 잡아먹히는 신세가 되지 않았다면, 인간이 죄를 먹고 마시며 비참하게 살지 않았다면, 온 세상이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다면 십자가의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사랑은 최고의 절망과 비참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커다란 부족이 커다란 사랑을 가능케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하면 칭찬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것은 죄인도 늘 하는 일이다. 너희가 너희를 돕는 사람만 돕는다면 상급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것은 죄인도 능히 하는 일이다. 너희가 받을 것을 바라고 베푼다면 그것을 베풂이라 할 수 있겠느냐? 아주 인색한 전당포 주인도 그 정도는 한다.”(눅6:32-34).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런 정도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보상을 바라지 말고 돕고 베풀어라. 내가 장담한다. 절대로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가 너희를 힘들게 하거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라. 누가 네 뺨을 치거든, 그 자리에 서서 맞아라. 누가 네 셔츠를 움켜쥐거든, 네 가장 좋은 외투까지 포장해 선물로 주어라. 누가 너를 억울하게 이용하거든, 종의 삶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아라.”(눅6:28-30,35).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채워주고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다.'가 됩니다.
그
래요. 사랑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너의 부족을 채워주고, 너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밥 한 술 퍼주는 것이 사랑이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 따뜻한 옷 입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공포에 떠는 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사랑이고, 가슴이 시린 자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빈 공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빈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빈틈, 누구에게나 있는 이 존재의 빈틈을 채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존재의 이유입니다. 옆에 있는 이의 빈틈을 채워주라고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불완전하게 만드신 것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왜 이렇게 문제 많은 세상, 불완전한 세상을 만들었느냐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왜 이처럼 나를 형편없이 만들었느냐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왜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을 내 옆에 두셨느냐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부족하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부족해야만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 사랑의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겠기에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하지 마시고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네가 부족한 게 많아서 내가 사랑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십시오. 나로 하여금 사랑하며 살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오히려 감사의 사례를 하십시오.
저는 죽음 앞에서 두 가지 근원적 진실을 보았습니다. 죽음 앞에 서보니까요 눈에 보이는 건 딱 두 가지였습니다. 생명, 그리고 사랑.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생명의 소중함과 생명의 위대함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제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남는 건 딱 하나더라고요. 사랑을 한 것만큼, 딱 그 만큼 남더라고요. 사랑 외의는 모든 것이 다 거품입디다. 돈, 명예, 권력, 업적, 살아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이 굉장한 것처럼 보였는데 죽음 앞에서 보니까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인생 최후의 실체라는 것을 저는 죽음 앞에서 보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떤 업적, 어떤 성취, 어떤 명예를 얻었다 해도 사랑이 빠진 인생은 건질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는 죽음 앞에서 제 인생에 사랑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다는 뼈저린 회개를 했습니다. 제가 늦은 나이에, 이렇게 교회 개척이 어려운 시대에, 함께 시작할 사람도 없이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도 다른 게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사랑의 수고를 하다가 이 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어서였습니다. 편안하게 살다 가는 것은 너무나 허망한 일이었기 때문에 정말 눈곱만큼이라도 사랑의 수고를 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교회 개척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랑의 수고가 빠진 인생처럼 허망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며 살았어도 사랑의 수고가 빠진 인생은 정말 허망합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흉물스러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수고가 빠진 인생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랑의 수고를 즐거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날마다 실행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을 감사하면서 기꺼이 사랑의 수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다가 아까운 세월 다 보내고 나면 죽음 앞에서 크게 후회할 것입니다.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인생이 너무 허망하다고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는 지금 사랑의 수고를 즐거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하나입니다. 사랑. 우리는 사랑을 위하여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근원적 진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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