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23장은 페니키아(베니게)의 두 도시 왕국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두로와 시돈은 고래로부터 지중해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서 도시 왕국으로 성장했다. 해안 무역 도시가 항상 그렇듯, 두 도시에는 세계 각국의 문물이 모여 들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성 했다. 또한 “바다의 요새”(4절)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외세의 침입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두로를 완전히 함락시키지 못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두로를 점령하는 일에 성공한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 뿐이다.
따라서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예언도 이사야 활동 당시에는 누구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두로가 파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스의 배들”(1절)이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스는 스페인을 가리킨다. 수출품을 가득 싣고 지중해를 건너 왔는데 그 물건을 받아 줄 항구가 없어졌으니 통곡할 일이다. 두로와 시돈의 멸망으로 인해 이집트 상인들도 말문이 막힐 것이다(2-5절). 그 재앙에서 피하려면 땅 끝으로 여겨졌던 스페인(다시스)으로 피신해야 했다(6절). 두로가 심판 받을 미래를 상상하며 이사야는 “이것이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던 도성 두로냐? 그토록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저 먼 곳에까지 가서 식민지를 세우던 도성이냐?”(7절)고 묻는다.
두로와 시돈이 과거에 자랑하던 영화를 생각하면 그들이 당할 재앙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멸망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놀라서 “누가 이런 일을 계획하였느냐?”(8절)고 묻을 것이다. 이사야는, 그것은 모두 “만군의 주님”(9절)께서 계획하고 실행하시는 일이라고 답한다. 이사야는 스페인에서 온 상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10절). 주님께서 두로와 시돈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11-12절).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사야는 “바빌로니아 사람의 땅을 보아라”(13절)고 말한다. 이사야가 활동할 당시에 바빌론은 앗시리아에 반기를 들었다가 산헤립 왕에게 심하게 해를 입었다. 그와 같은 일이 두로와 시돈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14절).
심판의 예언을 마친 후, 이사야는 두로와 시돈의 회복에 대해 예언한다. 심판 받아 멸망한 후 칠십 년 동안 두로와 시돈은 잊혀질 것이지만, 두 세대가 지난 후 다시 회복될 것이다(15절). 이사야는 두로와 시돈을 “창녀의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노래는 당시에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유행가였는데,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창녀가 다시 나타나 수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다시 그를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칠십 년 동안 잊혀졌던 두로와 시돈은 다시 회복되어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16-17절). 그 때가 되면 두로와 시돈의 상인들은 상업으로 벌어들인 부를 주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게 될 것이다(18절).
묵상:
두로와 시돈은 동서양을 잇는 항구 도시로서 오래도록 번영과 영화를 누렸습니다. 서쪽 끝에 있던 스페인(다시스)에서 혹은 남서쪽에 있던 이집트로부터 무역선이 부지런히 드나들었고, 동편 대륙에 위치했던 나라들은 새로운 문물을 사기위해 두로와 시돈으로 몰려 왔습니다. 두 도시 왕국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주변 열강들의 필요 때문에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이사야가 두로를 “빛나는 왕관을 쓰고 있던 두로”(8절)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질적 번영은 필경 영혼의 쇠락과 육체적 타락을 불러 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안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문화적으로 번성하지만 윤리적으로 자유분방하여 성적 타락의 온상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두로와 시돈에 대해 “온갖 영화를 누리며 으스대던 교만한 자들”(9절)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번영과 풍요를 위해 영혼과 정신을 팔았던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빛나는 왕관을 쓴” 여왕처럼 보였지만 실은 “가련한 창녀”(16절)였습니다. 그들이 자랑했던 해상 무역은 “제 몸을 팔아서 땅 위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의 돈을 끌어들이는”(17절) 성매매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예언에서 영혼을 팔아 물질을 사고 생명을 대가로 주고 쾌락을 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영원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물질을 팔아서 영혼을 사고 쾌락을 주고 생명을 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날이 오면” 가련한 창녀의 신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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