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초막 셋(막 9:4)

새벽지기1 2023. 10. 19. 07:00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4)

천상의 세계를 경험한 베드로는 그곳에 세 채의 초막을 짓겠다고 제언합니다. 그 세 채는 물론 예수님, 엘리야, 모세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발상이 조금 유치해 보이긴 하지만 나름으로 신학적 의미가 있긴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푸른 나무 가지로 만든 초막에서 지내야 했으며(느헤미야 8:14,15),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 분위기가 고조되었던(스가리야 14:16-19) 장막절의 전통도 없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씀도(계 21:3) 위 구절의 초막과 연관해서 생각했습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우리가 지금 초막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양면성이 있겠지요. 온갖 편의시설로 자리를 잡은 아파트와 개인 주택을 포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안락한 현대식 주거 장소에서 하늘나라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지도 모릅니다. 죽은 뒤의 천당도 그런 표상으로 각인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초막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현대인에게 불가능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또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원초적 영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초막은 문명을 거절하는 주거형태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이 바로 초막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천막을 치고 살았던 광야생활이 비교적 괜찮은 집을 짓고 살았던 가나안의 생활에 비해서 영적으로 훨씬 풍요로웠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생활공간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초막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초막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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