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막 1:27)
마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 중에서 시몬 형제와 안드레 형제를 제자로 삼은 것 말고는 최초의 이야기가 바로 이 회당 사건입니다. 이 회당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줄이면 ‘언어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언어는 앎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동시에 능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은 권위 있는 앎을 경험했으며, 귀신 축출이라는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안고 있는 존재론적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명령을 내리자 귀신이 순종했다는 마가복음의 보도는 곧 이런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설명하는 다른 경우에는 예수님이 어떤 동작을 하셨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말로 꾸짖고 명령을 내리기만 했습니다. 이런 데 관심이 있는 분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초자연적 사건 중에서 동작이 곁들여진 사건과 단지 말씀으로만 일으킨 사건을 분류해보십시오. 거기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귀신까지 순종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언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귀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대답은 틀린 건 아니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정확한 대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추정해볼 뿐입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히 일치함으로써 그것에 합당한 언어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사람의 언어는 그가 어떤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노름꾼으로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노름꾼의 세계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름의 능력을 행사합니다. 소위 고스톱에서 사용되는 언어인 고, 싹쓸이, 피박 같은 언어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정신을 노름으로 끌어들입니다. 시인들의 언어는 사람들을 그런 시적 상상력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들이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심어줌으로써 훗날 작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일치하신 예수님의 언어는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존재론적으로 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존재론적 능력이 예수님의 언어라는 말은 곧 예수님이 곧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요한복음 1:1절의 말씀도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로고스이며, 그 로고스로 존재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아직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오지 않으신 분들에게 이런 말은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다는 사실만 알아두십시오. 그리스도교는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처음부터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아두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언어로 기록된 성서에 계시되었다고도 말합니다.
어쨌든지 오늘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귀신을 제압한 예수님에 관한 보도를 읽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각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언어인지, 가리는 언어인지, 사랑의 능력을 드러내는 언어인지, 감추는 언어인지 말입니다. 가능한대로 우리의 언어가 더러운 귀신을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으면 합니다.
주님, 귀신도 순종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언어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임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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