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명혁칼럼

부모님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시 103:13, 말 3:17, 출 20:12, 엡 6:1-3, 골 3:20)

새벽지기1 2021. 8. 8. 06:27

지난 주일 전주 대언교회에 가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며 귀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어린이들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오늘 그레이스 선교교회에 와서 ‘부모님을 통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는 제목으로 부모님에 대한 설교를 하게 되어서 아주 적절하게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통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는 제목으로 간증 설교를 하기 전에 부모님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하시는 성경 말씀 몇 곳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시편 103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니리”(말 3:1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 중 한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라고 말씀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모 공경을 아주 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훼방하는 자는 반듯이 죽으리라 하셨거늘”(마 15:4).

사도 바울도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지적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저는 죄와 허물 밖에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아직까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달려가는 귀중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 때문이지만, 또한 고난과 핍박과 순교의 길로 걸어가신 그리고 부족한 저에게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죽도록 충성하는 순교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의 믿음 때문이고, 저를 너무너무 많이 사랑해주신 어머니 유춘택 사모님의 희생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제가 쓴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이라는 제목의 글을 줄여서 인용하려고 합니다.

『북한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진실하게 목회하시다 1950년 6월 23일 경 45세에 순교하신 분이 바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金冠柱) 목사님이십니다.

아버지는 1905년 9월 25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 558번지에서 안주 동교회 김현하 영수님과 김정숙 권사님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성리학의 학문을 중시하던 유교 가정에 시집 와서 남편과 아들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신 분은 주일 성수와 산 기도에 전념하며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전도한 김정숙 권사님이었습니다.

저의 할머니의 신앙으로 남편인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어 영수가 되었고 두 아들이 목사가 되었고 한 아들이 장로가 되었는데 맏아들인 저의 아버지가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서 법학 공부를 하다가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의학 전문을 나온 여의사와 결혼을 해서 1937년 6월 4일 저를 낳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동경신학교를 마친 후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미국에서 귀국할 때 일본에 들려서 저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신의주 제이교회에 와서 처음에는 부목사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로 9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목회 일에 바쁘셨을 뿐 아니라 신의주에 계실 때나 평양에 계실 때 주로 감옥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 아버지가 이따금씩 저를 칭찬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아물거립니다. 무엇을 물어보시면 제가 대답을 하곤 했는데 대답을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저는 신의주 감옥에 갇혀있던 아버지를 뵙기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감옥을 찾아가곤 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한치의 양보도 없이 절대 반대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아버지를 직접 뵙지 못하고 감옥 담장 밖에서 목소리를 돋우어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쳐서 아버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감옥에 계신 아버지가 들으시라고 목 소리를 돋우어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라는 노래를 불렀고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1946년 5월까지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9년 동안 목회 하시다가 1947년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들어선 공산정권이 아버지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소련이 참여하는 정치에 협조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자,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기독교 민주당을 결성하는데 참여했습니다. 공산정권은 결국 협조하지 않는 아버지를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체포해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으로 데려가 강제 노역을 하도록 처리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사동 탄광을 찾아가곤 했는데, 죄수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뵌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사동 탄광에서 중노동을 하면서도 동료 죄수들의 존경을 받고 간수들의 신임을 받는 모범 죄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실제로 받았습니다. 제가 평양 제5인민학교를 다닐 때 일요일 날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2년 동안 월요일마다 벌을 서고 매를 맞고 정학까지 당하면서도 주일 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아버지의 신앙적인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문밖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을 저의 몸과 마음에 깊이 심어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습니다. 제가 주일 성수와 예배 드림의 신앙을 지니고 살기 위해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 다음 달인 1948년 8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드림의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 싶은 소원을 지니고 11살 나이에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 넘어 월남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서술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는 세 번째 내용만 아주 간단하게 줄여서 서술합니다.) 첫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신앙과 기도의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후 목회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둘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셋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무엇보다 주님과 교회를 사랑한 충성스러운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성경 말씀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었다고 합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또한 저의 아버지가 애창하시던 찬송가는 다음과 같은 찬송가들이었다고 합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383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455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371장).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에 있을 때나 평양에 있을 때 남한으로 올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지는 주님과 교회와 양 무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월남을 거부하고 북한 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김관주 목사님이 평양 사동 탄광에 갇혀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가 아버지를 회유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저의 사촌 형님 김명길 목사가 장로교신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강량욱 목사가 사촌 형을 불렀다고 합니다.

“자네에게 특별히 부탁하네. 사동 탄광에 있는 숙부를 찾아가 한 번 이야기를 해보게. 이제라도 우리와 손 잡고 일을 해 보자고 말일세. 죽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말일세.”

김명길 목사는 당시의 상항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내가 사동 탄광에 김관주 목사님을 면회 갔을 때, 한번은 이런 제안을 드린 적이 있다. 내가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에게 말씀 드려서 큰 아버님을 석방하도록 건의할 터이니 나오셔서 강 목사님과 함께 손잡고 목회하시며 신학교에서 가르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정색으로 강하게 표현하면서, 내가 강 목사와 손잡으려면 왜 이곳에 와서 고생하겠느냐고 하시면서 다시는 그런 말은 입밖에 내지 못하게 하셨다.”

평양 서문밖교회 출신인 이승만 목사님은 1996년 7월 9일자로 미국에서 저에게 보낸 팩스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이승만 목사님은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와 미국장로교회(PCUSA) 총회장을 역임한 미국교회와 미국 한인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여러 면으로 수고 많이 하시는 소식을 늘 듣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옛날 김관주 목사님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나의 기억에 새롭습니다. 공산치하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말씀을 전하시던 장엄한 모습의 기억이 오늘까지도 깊이 남았지요. 제가 그때는 어렸으니까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그때의 형편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합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한 충성스러운 주님의 종이셨습니다. 그래서 평양에서 순교하신 최권능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의 뒤를 이어 죽도록 충성하며 주님과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시다가 평양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쓴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이라는 제목의 글을 요약한 글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저의 어머니 유춘택 사모님은 누구보다도 저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나는 너 없이는 못 살아” 라는 말을 자주 반복했습니다. “둘째는 십 리 밖에 셋째는 백 리 밖에 두고 살아도 첫째는 내 옆에 두고 살겠다”는 말도 자주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해 주시곤 했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지적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신의주에서 살 때, 동네 어린이 친구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좀 심한 장난을 치곤 했는데,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저를 야단 치지도 않았고 그런 장난을 치지 말라고 타이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어머니는 공부를 잘 하라고 타이르지도 않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타이르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자발성과 창의성을 지니고 막 달려가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릴 때 장난꾸러기로 살던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써서 출판한 『장난꾸러기 김명혁 목사의 막가파 이야기 모음』 이라는 책 서두에 실린 이야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 노릇을 많이 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중국 사람들이 가꾸는 도마도 밭에 가서 주인 몰래 도마도를 따서 먹으면서 좋아하기를 여러 번 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신의주 제이교회 교회당 지붕과 교회당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가 교회의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올라갈 수가 있었다. 교회당 맨 꼭대기에서 한참 신나게 놀다가 친구 하나가 똥이 마렵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종이 한 장을 내어 주면서, 그 위에 똥을 싸라고 했다. 그 친구는 종이 위에 똥을 쌌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는 똥이 담겨있는 종이를 손으로 들어 멀리 이웃집 지붕 위로 내던졌다. 모두들 너무 재미있어했다. 나는 이따금씩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 바닥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종이와 흙을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한 다음,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숨어서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좀 심한 장난을 친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친구들과 함께 썰매를 타고 그리고 숯불을 피워서 깡통에 담아 뱅뱅 돌리면서 이곳 저곳으로 달려가며 즐거워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함께 압록강에 가서 수영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나는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지만 공부는 비교적 잘했다. 글쓰기를 잘 해서 학교에서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어려서부터 아주 열심히 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을 아주 잘 들었는데 그 때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받은 감동과 은혜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주일 저녁 어른 예배 시간에 나가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

제가 어릴 때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어머니가 야단치지도 않고, 그런 장난을 치지 말라고 타이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자발성과 창의성을 몸에 지니고 막 달려가는 삶을 한평생 즐겁게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맏아들을 포기하는 희생을 감수하시는 순수한 사랑의 고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희생적인 눈물 어린 사랑이 평생 저의 가슴에 남아있게 되었고 저를 지탱하는 자양분과 활력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머니와 생이별을 한지 17년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편지 한 장이 왔습니다. 제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1965년 10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가 제 사진과 함께 편지를 써서 홍콩을 통해 북한에 보냈더니, 어머니가 받아보시고 두 달 후에 저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내셨습니다. 분명한 어머니의 멋진 필체로 써서 보낸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받아 들고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눈물 어린 사랑이 평생 저의 가슴에 남아있게 되었고 저를 지탱하는 자양분과 활력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님의 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아들 명혁에게, 9월 5일. 네 편지와 동시에 외로히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에 얼굴을 더구나 훌륭하게 된 내 아들을 …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번 꽉 쥐어 보고 십고나. 이 내 기쁨을 지면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 말 그대로 오래 오래 살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겟다.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하면서. 어머니 글 9월 29일.”

 

너무나 짧은 절규였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말하고 싶어도 다 말할 수 없는 그 짧은 사연 가운데 혈육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아픔과 기쁨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소원과 간구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후 다시 한 번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고 어머니도 다시 저에게 동생들의 소식을 알리는 편지 한 장을 써서 보내왔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어머니의 편지를 성경책 속에 넣고 읽으면서 어머니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편지를 복사하여 한국에 있는 할머니와 이모님들과 여러 친척들에게 한 장씩 보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앙정보부에서 집집을 찾아와서 편지 사본들을 모두 압수해 갔다고 했습니다. 제가 귀국한 후 제가 가지고 있던 편지 원본도 중앙정보부에서 빼앗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편지를 압수당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97년 1월 5일, 어머니의 편지 사본 한 장을 이모님으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30여 년 전의 감격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 편지 사본을 성경책 속에 넣고 다니면서 보곤 하고 사본 한 장은 저의 사무실 벽에 붙여두고 보곤 합니다. 저는 20여 년 만에 다시 읽게 된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어머니의 피 맺힌 사랑을 다시금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부르면서 북녘 하늘을 향해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가 국민일보에 실리게 되었는데, 그 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르고 또 불러도 못다 부를 그 이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르고 또 불러도 좋고 또 좋은 그 이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편지 원본을 압수당한지 20여 년 만에 편지 사본을 받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5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어머니의 예쁜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나는 어머니를 부르고 또 불러 보았습니다. 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는 너무나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의 애절한 절규를 한 마디 한 마디 다시 들으면서 어머니의 가슴에 피 맺힌 아픔과 슬픔을 가슴으로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셨고, 너무나 사랑하시다가 나중에는 나를 남쪽으로 떠나 보내시는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있어 맏아들을 스스로 잃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스스로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로 하여금 가장 큰 희생을 치르며 가장 큰 아픔과 슬픔을 안게 한 나의 불효를 무엇으로 갚아 드릴 수 있사옵니까? 어머니, 나의 불효를 책하시고 또 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에게 얼굴 한 번 보여 드리지 못했고, 그렇게도 잡아보고 싶어하시는 손 한 번 쥐어 드리지 못한 채 20여 년이 지났고 30여 년이 지났으며, 이제는 50여 년이 지났습니다. 이 몹쓸 불효 자식을 책하시고 또 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철도 없이 어머니를 훌쩍 떠나 남쪽으로 온 다음 한 2년 동안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물론 이모님들이 나를 잘 보살펴 주셨지만 나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도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나는 부족함이 없는 한 생애를 살아 왔습니다. 아니 너무나 넉넉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에게 조그마한 위로와 기쁨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고 싶은 단 한 가지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를 떠나 남쪽으로 온 저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많이 사랑하셨고 너무나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마음껏 공부도 할 수 있게 해 주셨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길 수도 있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 나는 병원에 가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건강하게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행복한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만 특히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팔순이 훨씬 지나신 어머니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면 나는 어머니를 마음껏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몸도 씻어 드리고 싶고, 음식도 대접해 드리고 싶고, 그리고 어머니의 품 안에서 함께 잠도 자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지금 하늘 나라에 계시다면 먼저 순교하신 아버지를 뵈올 터이니, 어머니의 슬픔을 거두시고 위로와 기쁨을 아버지와 함께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요사이 나는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많이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처음 드려보는 기도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 뵈올 날을 날마다 기다리겠습니다. 먼저 천국에 간 어머님의 손자인 나의 사랑하는 아들 철원이, 나를 늘 칭찬해 주시면서 나에게 신앙의 뿌리를 심어 주신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누구보다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신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뵈올 날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바르고 진실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어머니가 진실하게 사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1997년 1월 12일 불효 자식 명혁 올림.”

 

이것으로 ‘부모님을 통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는 제목의 간증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저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저의 사랑하는 어머니 유춘택 사모님을 통해서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너무너무 크고 놀랍다는 간증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사실 과거와 오늘의 제가 이곳 저곳으로 달려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살게 된 것은 망극 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 때문이지만, 동시에 부모님께서 저에게 물려주신 순교 신앙과 순수한 희생적인 사랑의 유산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부모님과 이별한 후 평생토록 주일 성수의 신앙과 새벽기도의 신앙과 순교 신앙을 가장 귀중한 신앙으로 알고 몸에 지니고 실천하면서 살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 저의 몸에 심어주신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예배 사랑과 이웃 사랑과 기도 사랑의 영적인 유산을 몸에 지니고 실천하면서 한평생 살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별과 재난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도 주셨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저에게 유익한 보석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요 모두가 아버님의 고난과 순교의 은혜이고 어머님의 순수한 사랑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이제 저의 남은 과업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넉넉하게 베풀어주신 신앙의 자유와 목회 및 선교 사역의 경험과 축복을 북한 동포들이나 무슬림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부족한 저도 저의 아버지처럼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도 “드림과 나눔”의 삶을 살다가 죽고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여!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립니다! 아멘! 아멘!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조만간 하늘 집에서 반갑게 만나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