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이란 말이 본래는 선(先) 삼일 후(後) 작심 즉, 3일동안 생각한 후에 결심을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선(先) 작심 후(後) 삼일 즉, 결심이 3일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술을 끊겠다고 결심해도 바로 그 날 저녁에 다시 술을 마신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해도 회식에서 그동안 먹지 못했던 것까지 다 먹어치운다. 새벽을 깨워 집요하게 기도하겠다고 결심해도 1주일이 못되어 그 결심을 깨고 만다.
금방 결심을 깰 경우 괴로워하는 것까지는 누구나 다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결심을 깬 순간부터 ‘이왕 버린 몸 어쩔 수 없지’하고 결심하기 전의 행태로 편하게 돌아가는가? ‘결심하고 못하면 괴로움만 더할 뿐인데…’하면서 결심도 하지 않는 안일한 삶을 사는가? ‘결심은 인간적인 생각이라 성령의 인도대로 살기 위해 결심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는 식의 고도의 ‘신앙적인’ 사고(思考)를 하는가?
사람은 타락한 존재라 아무리 결심해도 금방 구습(舊習)으로 돌아가는 타성이 있다. 이런 타성은 어떤 논리로 정당화해도 그것은 타락한 존재의 부패한 논리이다. 성도는 썩어져가는 구습으로 돌아가는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구습타성과 구습논리를 파쇄(破碎)해야 한다.
성도는 날마다 순간마다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2∼24) 성령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매순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도록 감동시키신다. 성도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따라서 결심대로 사는 것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새 사람을 입는 삶을 순간마다 결단하고 살지 않으면 옛 사람의 삶에 빠질 뿐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는 궤변적 논리까지 만들게 된다. 작심삼일이 괴로우면 삼일마다 작심하면 된다. 아니 작심일일(作心一日) 매일 결심하고 작심일순(作心一瞬) 매순간 결단하면 된다. 성령에 따른 작심일순(作心一瞬),순간마다 새롭게 결단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삶을 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