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새벽지기1 2017. 10. 9. 07:53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다시 베다니를 찾으십니다. 베다니는 성경에 나오는 지명(地名)으로 예수님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병자들이 치유를 받았고 귀신 들린 자들은 온전해졌으며, 방황하던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 중에 클라이맥스는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입니다. 나사로는 시신인 상태로 사흘 동안 무덤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문을 치울 것을 말씀하시고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수의를 친친 감은 채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 집에서 잔치

 

아직도 베다니 마을 사람들은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던 그때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셔서 나사로의 집에 계시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마태복음 26장 6절에서 13절까지와 마가복음 14장 3절에서 9절까지 말씀과 종합해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다시 가셔서 나사로의 집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문둥이 시몬’의 집으로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으로 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문둥이 시몬’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과거에 시몬은 문둥병자였으나 예수님께서 치유하셔서 이젠 온전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시몬이 여전히 문둥병자라면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셔서 시몬의 집으로 가시고 제자들, 마르다, 나사로, 마을 사람들도 함께 갔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집에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참석자들은 모두 희색이 만면한 채 마치 명절과 같은 분위기를 즐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전에 문둥병자였다가 깨끗하게 된 시몬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일을 추억하면서 예수님 앞에서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만찬을 즐겼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들락날락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마르다와 같은 사람들은 잔칫상 음식을 준비하느라 시몬의 집안 분위기는 분주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온누리교회는 예수님을 모시고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천국 잔치를 벌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덧붙여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축복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 올 때마다 예수님으로 인한 간증, 기적, 사랑, 감동 등을 지체들과 나누려는 기쁨에 뜀박질하면서 오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다니 마을 사람들이 시몬의 집에 모여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행한 봉사 활동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즐겁게 집안 청소도 하고 음식도 장만하며 예수님을 위한 환영 잔치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원해서 봉사하고 헌금하게 되면 굉장히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연세대에서 설교를 마치고 장로님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 계산을 하려고 하니 어느 분이 먼저 식사비를 지불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어째서 식비를 계산했느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목사님하고 식사할 기회가 자주 있겠느냐’며 자원해 저녁 식사를 제공한 것을 무척 기뻐했습니다. 아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도 자원하는 봉사가 많았을 것입니다. 봉사는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쓰레기를 정리해 버리는 봉사는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3절 말씀을 봅니다.“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시몬의 집에서 잔치 분위기가 무럭 익어가고 있을 때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여인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아주 값비싼 나드 향유가 들어 있는 항아리를 들고 있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임금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의 일 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입니다. 그 여인은 잔치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값비싼 나드 향유를 붓는 마리아

 

그리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잔치 분위기로 들떠 있던 온 집안에 나드 향기로 가득하게 됩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 여인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곧 여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 말씀을 연결시켜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베다니에서 잔치를 벌인 곳은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문둥병자인 시몬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대화를 나누며 만찬을 즐기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요한복음에선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선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 여인의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보통 일상적인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여인은 매우 귀하고 값이 아주 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은 것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 세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값비싼 향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소장 가치가 있는 일종의 보물 같은 것입니다.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쏟아 부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여인에 집중됩니다. 여인은 계속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하나, 그 여인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께 쏟아 부었으니 말입니다. 둘, 그 여인에 대해 무관심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예수님께 붓더라도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셋, 아무리 좋고 선한 일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한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선 실명을 들어 마리아라고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귀하고 비싼 나드 향유는 마리아 자신도 평소에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돈이 아닙니다. 생활비의 일부에서 떼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나드 향유처럼 따로 구별해 간직했다가 특별한 목적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4~6절 말씀을 읽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비판적으로 말합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어 낭비하지 말고 내다 팔아서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것입니다. 아마 그는 자신의 말에 예수님께서도 동의하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위를 비난하는 가룟 유다

 

값비싼 향유를 팔아서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자는 말은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성도들의 헌금을 받으면서 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가룟 유다는 비판적으로 말하지만, 과연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행위를 거부하시지 않으십니다. 만약 제가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저의 양말을 벗기고 발에 향유를 부으며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어준다면 얼마나 당황한 일이겠습니까? 아마 저는 괜찮다면서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이 황당한 일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십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한 명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봉사했지만,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일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봉사도 하며 직분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그런 일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비전에 동참하지 않으면서도 따라 다닌 이유는 나름대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일을 함께 하지만 마음은 딴 곳에 두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이나 사회 생활을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지냈지만, 여느 제자들과 다르게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길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는 사역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돈 궤를 맡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회개를 맡았던 것입니다. 회계를 맡은 사람은 항상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은 본의 아니게 항상 유혹으로 내몰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가룟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사회개혁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를 들먹이면서 마치 자신들이 그들의 대리인인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치고 정말 돕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 말뿐이고 자기 철학일 뿐입니다. 삶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하면서 말이나 글로 앞세울 뿐입니다. 바로 가룟 유다가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마리아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순간적 낭비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향유를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룟 유다를 동기가 불순하고 가난한 자를 이용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돈을 맡아 헌금을 관리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헌금의 일부를 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에게 발끈한 이유는 한 순간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한 면도 있지만, 향유를 판 돈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게 좋겠다는 말 속엔 예수님께 부어 버린 향유를 아깝게 여기는 마음과 약간의 돈을 훔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 세 복음서를 종합해 볼 때,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마리아의 아름답고 귀한 헌신을 세상의 잣대로 보느냐며 나무라십니다. 마가복음 14장 8절에서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에 대한 이유로 요한복음 12장 1절에서 유월절 엿새 전, 엿새가 지나고 이레가 되는 날에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제자들도, 나사로도, 동네 사람들도 모르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비전이란 선하고 좋은 일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마리아가 그 비전을 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면,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의 무릎 맡에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비전을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항상 예수님께 가까이 해서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일하느라 분주했지만,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알 수 있었고, 머지않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전을 미리 보는 마리아

 

지금 우리의 비전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이 가까움을 아는 것입니다. 세태가 돌아가고 있는 현상을 살피면, 악은 점점 강성해지고 각종 테러와 전쟁 그리고 경제적 불황은 빈발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비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하고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향유를 붓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의 의중을 충분히 아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마리아의 그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비판을 가한 것입니다. 7, 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니 하시니라.”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것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거룩한 낭비입니다.


오늘 우리가 헌금하는 것, 건물을 짓는 것, 인공위성을 띄우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라시면 세우는 것이고, 인공위성을 통해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져 있는 650만 교민들과 1만 2,000명의 선교사들에게 24시간 방송하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런 것들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당시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알고 있었듯이,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느끼고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이 가까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이 흘러간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계 선교가 이런 식으로 끝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생명을 바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며, 상처 받은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해야 하는 비전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충동적으로 옥합을 깨뜨리지 않았듯이, 성도님들도 충동적으로 헌금하지 말고 비전을 갖고 해야 합니다. 또 마리아는 향유의 가치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마리아가 알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거절하시지 않고 가만히 놔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신중하게 예수님께 향유를 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비전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

 

사랑하는 성도님들, 온누리교회라는 하드웨어는 없어져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우리가 흩어져도 문제될 게 전혀 없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를 낳았듯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영향력을 받게 되며, 삶에서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부분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는 사실입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들, 참된 비전이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예수님의 비전으로 가슴을 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의 삶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 삶, 믿음이 한 단계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믿음으로 인내하는 삶이되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오늘 설교를 들은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생각, 마음, 비전을 심어주시고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참된 복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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