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한국에 들어와 불법 체류자가 되어 경범죄로 구치소에 갇혀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면회 오는 사람도, 영치금을 넣어주는 사람도 없이 외롭게 쓸쓸하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찾아와 “목사님, 교회가 그들을 돌봐줘야 합니다. 교회가 찾아가 함께 교제를 나눈다면, 그들은 외국에서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과일 하나와 소액의 영치금이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위로가 될 것으로 봅니다. 상대방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용기를 주는 것이 바로 감동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동
감동은 쾌락과 다른 것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감동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순화시키고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감동입니다. 인간은 감동을 받으면 분노, 미움의 감정마저 풀게 됩니다. 강하게 내세우던 주장도 서서히 양보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감동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7, 28장 말씀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결박당한 채 간수의 호위를 받으며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합니다. 도중에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 행선하던 사람은 모두 276명이었습니다. 바울을 비롯해 그를 호위하는 간수도 있었고 상인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광풍을 만나 해도 달도 별도 볼 수 없는 암흑의 상태에서 14일 동안 바다 위 배 안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마 그들은 죽음과 같은 공포감으로 인해 질식한 상태였을 겁니다. 무서운 파도와 거센 비바람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모든 짐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상태라 먹을 것도 하나 없이 절망적인 상태로 지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련한 사공도 아니고 훈련된 군인도 아니었습니다. 곧 죄수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끌려가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바다 위에서 대작하는 광풍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27장 23절에서 25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어 봅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에게 감동 받은 사람들
광풍을 만나 엄청난 공포감 속에서 모두 혼비백산한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함께 행선했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안심할 것을 일러줍니다. 바울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결국 배는 멜리데 섬에 닿았습니다. 선체는 파선 직전의 상태였지만 행선했던 사람들은 완전 초죽음 상태로 전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떨고 있었지만 바울에게 큰 감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멜리데 섬에 살고 있던 토인들은 죽음의 바다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을 환대해 주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차서 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한 뭇나무를 불에 넣자 독사가 튀어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토인들은 바울을 향해 살인자라고 했습니다. 풍랑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벌을 받아 결국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이 붓거나 죽지도 않자 토인들은 마음을 바꿔 바울을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가 바울의 일행들을 사흘이나 유숙하도록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들어가 안수하고 기도하자 토인의 아버지는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런 기적은 사도행전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세계 각 처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 사이에도 많이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고 여호수아 선교사님은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고 선교사님은 고막이 터져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들이 많은 지역에서 사역했습니다. 그에게는 부인과 중보기도 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통성 기도를 하고 나면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이비인후과 의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세밀하게 진단할 수 없었지만, 소견대로 의술을 펴면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버블리오의 아버지를 낫게 해 주자, 그로 인해 토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감동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거센 광풍에서도 살아난 감동이 있습니다. 둘째는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감동과 안수로 병을 낫게 되는 감동이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믿게 되는 감동이 있습니다. 광풍은 잠잠해지고 모든 정황은 정상 상태를 되찾았으며 다른 배를 얻어 타고 로마로 향하게 되었지만, 바울은 여전히 죄수라는 타이틀은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간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로마로 향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 그곳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방문객들에게 간증도 하고 성경 말씀도 증거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진정한 비전은 감동을 주는 것
진정한 비전이란 쾌락이 아니라 감동입니다. 감동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적 비전을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도행전적 비전이란 땅의 감동이 아니라 하늘의 감동이며, 순간적 감동이 아니라 영원한 감동인 것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했지만 그에 대한 재판 일정은 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형사범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신 구속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간수는 일정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바울에게 달리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소 여유를 자질 수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우거하는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날짜를 정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바울과 삶의 패턴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나라의 일로, 기업체의 업무로, 개인적인 목적으로 세계를 여행하면서 이상한 일을 경험합니다. 배, 비행기, 기차, 자동차 안에서 예기치 못한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다가 이장희 형제를 만나 길거리에서 영접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계획도 없이 그 분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저는 열심히 사영리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성령님의 감동을 입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안전을 위해 잠시 차를 세우게 하고 영접 기도를 한 후에 다시 운전하게 했습니다. 저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저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로마에서 일정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예기치 못하게 틈틈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갑니다.
감동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바울은 우거하던 집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르치는 바울이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 상당히 흥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접촉하게 되면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 밤을 지새우며 성경을 읽기도 하고, 때로 자다가 일어나 기도도 하게 됩니다. 그 현상은 어떤 분께서 만져 주시고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억지로 예수님을 믿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마지못해 찬송하고 설교 듣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불같은 심령이 되어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흥분의 상태로 바울은 로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강론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르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둘,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구약 성경 전체 내용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 오경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항상 그것을 연구하는 자세를 견지합니다. 셋,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것입니다.여기서 우리는 설교에 대해 세 가지 핵심 주제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주제로 하든지 설교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경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를 포함해야 합니다. 흔히 설교를 통해 헛소리를 많이 합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친다고 해 놓고 그 핵심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보게 됩니다. TV 뉴스의 사설이나 신문 기사로 설교하면 안 됩니다. 설교는 수필이 아니며 명상은 더욱 아닙니다. 설교는 기쁜 소식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파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바울과 방문객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을 가르치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들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만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설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목사나 선교사라는 타이틀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적 비전입니다. 24절 말씀을 봅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세상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매우 객관적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지만, 본문에선 복음을 전하자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곧 은혜이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곧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로 믿는 것입니다. 잠도 못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 세수하고 단장한 후 교회에 오면 주차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은혜이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은혜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믿지 못할 이유가 더 많습니다. 이성적으로 따진다면 못 믿을 게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그분의 크고 놀라운 은혜 때문입니다. 25~27절 말씀을 읽습니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떠올립니다. 25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절묘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사도 바울과 같은 전도자를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은 파송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이유도 복음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서 15절까지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이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게 되는데, 믿지 않으면 어찌 구원이 있으며 보내지 않으면 어찌 전파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하는 사람을 파송하는 일입니다. 전도자는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듣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것까지 전도자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가 ‘사도행전적 비전’
우리는 복음 전도자를 세상 끝까지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해야 합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그대로 믿지만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자꾸 두드려 봐야 합니다. 사람이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이 로마에 가지 않았더라면 로마에 있던 백성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를 거쳐 서머나까지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듣지 못하면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냐 아니냐, 재판을 받느냐 못 받느냐, 수감 되느냐 마느냐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부탁하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의 발걸음이 곧 비전이었습니다. 우리가 병들고 수모를 받으며 병신이 되고 바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만 있다면. 그 길로 걷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비전’입니다. 이번에 ACTS 29 헌금에 일만 명이 넘는 성도님들이 참여해 165억 원을 작정해 주셨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어려운 때에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강요한 것도 아니고 기도를 부탁했는데, 성도님들이 마음을 모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헌금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선교센터를 건설하며 비전교회와 선교지교회 그리고 협력교회를 돕게 됩니다. 또 건강한 세상을 꿈꾸는 일에 헌금을 사용할 것입니다. 저는 ACTS 29 헌금을 통해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 비전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도 뛰어넘는 것이 비전인 것입니다. 둘,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은 역경을 극복하려는 열정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셋, 개인의 힘보다 함께 하는 힘이 파급 효과가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남양주교회가 세워집니다. 또 경기도 동탄과 평택에 교회 설립이 준비 중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나고야교회, 중국 모처에 3개 교회, 미국 포틀랜드에 협력 교회가 설립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목사님들은 모두 그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가서 전하고 나눠줘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가 조금 적게 갖더라도 잘 훈련 받은 좋은 목사님들을 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비전이고 사도행전입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에서 사도들의 행적들로 꿈틀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행전적 비전이 나의 비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비전이 되게 하시며
온누리교회의 비전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성만찬을 나눌 때,
주님의 성령께서 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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