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역사에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역사입니다. 사람이 모여 계획하고 행동하며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인간은 종교나 이념 혹은 정당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역사를 이뤄나가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역사입니다. 인간은 천재지변을 어찌 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연에 의한 역사의 흥망성쇠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만드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인간과 자연에 개입하셔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세상을 바꾸시는 예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천지 창조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들어오셔서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우주 만물을 만드시며 인간을 만드신 창조 행위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분명한 행위입니다.하나님께서 주인으로서 역사를 창조하실 뿐 아니라 통치까지 하십니다. 노아의 홍수는 천재지변이나 자연재해가 아니었습니다.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로 온 땅에 비가 쏟아졌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자연 현상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물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지구의 생명을 멸절시켰던 역사 개입의 독특한 사건인 것입니다. 100세의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90세의 사라에게 경수가 끊기고 생물학적으로 생식 불능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태를 여시고 아기를 낳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 자연의 법칙, 불가능의 벽을 뚫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먼 훗날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정당을 조직하고 군대를 창설하며 종교를 만드는 것을 사람의 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자연법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새 역사를 창조해 가시는 것을 하나님의 비전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역사 안에서 통치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지금의 어려움과 불안감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불가능의 문을 여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마지막 날을 보는 게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께서 인류사에 개입하셔서 많은 민족들 중에 믿고 따르며 예배하는 한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할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온누리교회에서 유대인 크리스천 키이스 인트레이터 목사님이 “그날이 속히 오리라”는 제목으로 종말론적 설교를 하셨습니다. 종말론의 심판에 관한 설교를 하면 성도님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에 요즘 한국 교회는 종말론 설교를 잘 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키이스 목사님의 종말론 설교는 아주 귀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에 종말이 있고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날에 역사가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 개입, 구원, 영원한 승리를 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여호수아 6장 말씀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 한국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 미래 인류사에 개입하시는 것에 대한 모델로 삼을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이 말씀에서 절망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여리고는 군사, 행정,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이고 주민들도 거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발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긴박한 절망감 속에서 여리고 성의 문을 굳게 닫아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여리고의 철옹 성벽을 깨뜨릴 수 있을까요? 2, 3절 말씀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우리는 ‘트로이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 누구도 트로이를 공략할 수 없었는데, 한 장군의 기지와 용기로 결국 성문이 열리고 트로이는 점령당하고 맙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트로이 목마’에 관한 이야기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트로이 목마는 인간이 만든 역사의 전형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용병술로 불가능의 벽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은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훈련된 군사들에 의해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함락되고 있습니다. 2절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리고 성과 여호수아의 군사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강대국 구 소련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시면 언젠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하는 성도들의 기도가 살아 있다면, 우리나라는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한 개인, 정당, 이념 등에 의해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잘못한 게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의 잘못과 허물을 핑계하는 일입니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층과 크리스천들은 잘못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충분한 회개가 있은 후에 새 역사 창조를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개인의 뜻의 구별해야
또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개인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큰 위기를 맞게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건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믿음을 갖고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으니, 우리도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라고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라”는 말씀에 의지해 베드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크리스천들은 결정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지금 한국 교회는 위기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비전은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비전은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남이 하는 것을 따라 하거나 반복해 거듭하는 것도 비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저는 풀러신학교에서 피터 와그너라는 사람에게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설교자에 대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도를 결심하고 열심히 전도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기도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누가 죄가 있어서 그렇다고 말해 10년 동안 일기를 뒤져 기억나는 죄를 모두 회개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대중 설교가 아닌, 20~30명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은사임을 깨달았습니다. 설교의 은사과 가르치는 은사는 다른 것이고, 사람마다 받는 은사도 다른 것입니다.
개인에게 주시는 분명한 말씀이 비전
비전이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3절 말씀처럼 분명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생각할 때, 막연한 상상이나 기대감으로 판단한다면 큰 낭패를 보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4, 5절 말씀을 읽습니다.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드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은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내용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이지, 개인적 상상이나 추측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루에 한 번 6일 동안 여리고 성 주위를 돌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에 여섯 번을 한꺼번에 돌아버리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하루에 한 번 6일 동안 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7일에 일곱 번을 돌라고 말씀하십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막연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인생을 계획할 때도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처럼 해선 안 됩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지, 주변 상황을 따를 것인지에 대한 선택입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폭풍이 몰아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두 번째로 비전은 창조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송이 꽃이나 물 속에 노니는 물고기를 보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것을 생각하시고 디자인하셨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완벽한 조화로 기가 막히게 창조하신 솜씨를 찬양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서 여호수아의 군사들은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번 도는 것으로 끝이 나고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7일에 일곱 번을 돌고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에 따라 백성들이 크게 함성을 지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매우 창의적이면서도 한편으로 해괴하기까지 합니다. 손자병법에도 없고 군사백과사전에도 없는 전법입니다. 우리가 전도하거나 선교할 때도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탁월하신 생각과 방법을 주셔서 세상 세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창의적인 전술 전략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곧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뜻합니다. 전쟁은 원자폭탄이나 첨단 무기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순종에 따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6일 동안 하루에 한 번 돌고 제7일에 일곱 번 돌면서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서 그것을 신호로 백성들은 크게 함성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볼 때 바보처럼 보이는 순종입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상식에 맞지 않은 것이 많고,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면 사람들로부터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게 싫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결과는 여리고성 함락
하지만 설교자는 이런 부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즘 미국에선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해 설교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런 설교를 하게 되면 고발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게이와 레즈비언을 싫어하십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 내용이 부담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바보처럼 그대로 순종합니다. 8, 9절 말씀을 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이 말씀에 대해 우리는 눈을 감고 한 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전법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사분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묵과 외침의 원리에 대해 말해 줍니다. 침묵할 때는 절대 침묵하고, 외칠 때는 크게 외치라는 것입니다. 10,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 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 참 신통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잠을 잡니다. 여리고 성 주위를 돌라면 돌고, 침묵하라면 침묵하고, 잠을 자라면 잡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된 군사들의 모습입니다. 훈련된 사람들만이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2절 말씀입니다.“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라.”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한 바퀴 돌라고 말씀하시자,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순종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따릅니다. 다음으로 15절 말씀입니다.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제7일에도 모두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신 것도 새벽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기쁨의 소리를 질러대자, 사람들은 제자들을 향해 아침부터 술을 먹은 것으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여리고성을 허물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새벽에 만나가 온 지면에 가득 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면 만나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새벽에 찾아옵니다. 죄의 문화는 밤에 왕성해집니다. 저는 밤 9시에 주무시라고 항상 말씀드립니다. 죄는 밤 9시 이후에 발생하기 쉽습니다. 죄가 깊을수록 밤도 깊은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새벽에 무너진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랐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할 때 여리고 성을 허무는 것과 같은 부담을 갖게 됩니다. 때로 인생을 포기해야 하고 생명을 담보해야 하며 심지어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불가능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여리고 성이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어차피 무너뜨려야 할 성이라면 과감하게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판단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조의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 능력을 잡고 도전할 때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모두 이겨내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도와주옵소서.
믿음의 양각 나팔을 불게 하시고 언약궤가 앞서 가게 하옵소서.
창조적인 생각으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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