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죽음을 맞기 직전에 쓴 마지막 서신이기에 그의 유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른 교훈에서 떠나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지라도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행하고 직무를 다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예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삶을 추억했을 것입니다. 그는 수없이 매를 맞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채찍으로 세 번 맞았으며, 돌로 한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파선당하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 위를 떠다녔습니다. 또 여행 중에 강도, 동족, 이방인, 도시, 강, 광야 등의 위험을 받기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8절에서 바울의 고난에 대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한 바울
이제 사도 바울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최고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의 결론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역을 행하면서 자신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관제와 부음이 되고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면서 순교의 마음을 다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용어로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고 말합니다. 관제란 성경 레위기나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매일 두 번씩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돼 있습니다. 해가 뜰 때와 질 때에 흠 없는 어린 숫양을 잡아서 드렸는데, 이를 화제라고도 하고 상번제라고도 합니다. 그때 제물로 사용되는 숫양 위에 포도주를 부어서 드렸는데 이를 관제 또는 전제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 관제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빌립보서 2장 17절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포도주를 부듯이,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빌립보의 성도들과 함께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관제로 드린 바울
여기서 바울이 자신을 관제로 드리겠다는 고백은 미래에 있을 가정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에선 가정이 아닌 현실로 이뤄진 것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관제로 드려짐을 말할 때, 우리는 모름지기 한 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때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셨습니다. 창에 옆구리를 찔려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은 온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쏟아부으신 관제였습니다.바울은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떠나다’라는 말은 죽음에 대한 관례적인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선착장에 정박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묶어둔 것을 다시 푼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세상에 종말이 다가왔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관제로 부음과 같이 모든 것을 드렸고, 항구에 단단히 묶여 있던 배가 출항을 위해 풀렸다는 의미에서 세상의 때가 다 되었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나그네의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본향, 거룩한 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성도의 삶은 ‘항해자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구원의 항구에 입항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것입니다. 비록 그 항해에서 파도가 치고 풍랑이 몰아칠 수도 있지만, 성도의 삶은 안전한 구원의 포구를 향해 가는 항해자의 길인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의 삶을 잘 준비했기 때문에 험난한 항해자의 길과 같은 인생을 최고 수준에서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 전주에서 천만큐티운동본부에서 주최한 ‘터치 2003’ 집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고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갖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 어느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동창생이라고 밝혔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을 내밀었습니다. 그 친구는 안경을 끼고 얼굴엔 여드름이 많았습니다. 지금 그 친구는 전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마지막 날을 맞게 됩니다.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은 세월을 따라 나날이 쇠해져 가는 것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세월은 화살과 같이 빠르게 지나고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미래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을 잘 준비했기 때문에 최고로 아름다운 인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7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난 후 30년 동안 산 사도 바울의 인생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라
첫째로 ‘선한 싸움을 싸우다’는 것은 위대한 경주를 완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2절 말씀을 통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했던 수많은 성도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디모데에게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강조합니다. 선한 싸움이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며, 이웃에 대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너무 많은 싸움들을 접하게 됩니다. 규칙을 무시하고 악한 방법을 사용하며, 상식 이하의 난장판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음모가 횡행하고 속임수가 난무하며 협잡(挾雜)이 판을 칩니다.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설 자리가 전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선한 싸움을 싸워주십니다.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들었지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싸움이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돌려대는 것이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는 것이며,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동행해 주는 것입니다. 또 로마 병정들이 채찍으로 무지막지하게 쳐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신호로 가룟 유다의 그 배반의 입맞춤을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싸움을 싸우시고, 바울도 선한 싸움을 싸웠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진리를 지키기 위한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안디옥교회에서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온 이방인들이 방문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사회적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바나바도, 다른 사람들도 따라 나갔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왜 외식하는가, 왜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피하는가’라면서 책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수호와 선한 싸움을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비록 돌에 맞고 공포와 핍박에 처하게 될지언정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위해 받게 되는 고통, 환란, 핍박 등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시고 승리하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달려갈 길을 완주하라
둘째로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울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는 문구를 쓸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서 3년 동안 에베소 지역에 머물면서 두란노서원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양육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바울은 새로운 비전을 품고 로마로 가기를 원하면서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붙잡기만 하면 결박해 감옥에 가둘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심지어 목숨마저 빼앗을 수 있는 험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던 에베소교회 리더십들을 예루살렘 밑에 있는 항구 도시 밀레도로 불러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겠다는 자신의 비전을 밝혔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에베소교회의 많은 리더들은 말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에베소교회 리더들이 만류했을 때,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의 말씀을 통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36~38절까지 말씀에서 바울은 비전을 말하고 난 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모든 사람들이 실컷 울고 서로 바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말씀과 본문 말씀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바울은 충분히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에 주신 ‘ACTS 29’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달려갈 길을 끝까지 완주해야 합니다. 2,000개의 교회를 세우고 10,000명의 사역자를 보내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경주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의 각 가정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
셋째로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보물, 재산 등 귀한 것을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의 비밀을 끝까지 지켰다고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20절 말씀에서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곧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키라고 부탁한 것은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은 바를 포기하지 않고 모든 유혹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또 처음 말과 처음 품은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참 모습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에서 바울을 만나 이방 선교에 대한 비전을 주신 후로, 그는 흩뜨리지 않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많이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녘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시자, 많은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유혹에 거하시지 않고 도리어 홀로 빈들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로 되도록 기도하실 때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지키는 것은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마치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해 두었다가 신랑이 왔을 때 등불을 켜고 마중 나간 것과 바울의 충성된 것이 믿음을 지키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고전 4:2)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바울은 자신이 맡은 믿음을 충성되게 지켰습니다. 바울이 최고의 인생으로 살 수 있었던 까닭은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읽습니다.“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바울을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
이제 바울을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의 마지막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그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위한 의의 면류관이 준비돼 있음을 고백합니다. 올림픽 경기는 각 도시를 대표한 선수들이 출전해 기량을 겨룹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2년의 훈련 기간을 거쳐 경기에서 승리하게 되면 월계관을 쓰고 금의환향합니다. 당시 전통은 도시의 모든 성문들을 걸어 잠그고 승리자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새로운 문을 달았다고 합니다. 승리자는 성벽을 돌면서 자신을 위해 만든 문을 찾아 들어서면 준비된 마차를 타고 스타디움으로 향합니다. 모든 관중들은 일어나 환호하고 꽃을 뿌리며 환영 의식을 갖습니다. 또 승리자가 조각가 앞에 포즈를 취하면 스케치해 곧 조각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바울은 그런 그림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후로 자신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 천군천사들과 믿음의 조상들이 참 잘했다고 축하해 주는 팡파르와 축복의 소리를 들으면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의의 면류관을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신다고 선언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면, 믿음을 지킬 때 필요한 것은 의의 면류관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해 준다면, 의의 면류관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과 다시 오셔서 바울에게 주심과 같이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갖게 해 줍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배턴을 넘겨준 것처럼, 다윗이 솔로몬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처럼,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배턴을 넘겨준 것처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배턴을 넘겨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디모데는 그 배턴을 우리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바울처럼 최고의 인생이 돼야 합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구원의 항구로 향할 때 낙관, 절망, 고난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큰 파도가 덮칠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했던 핍박이 있을 수도 있으며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기에 우리에게도 의의 면류관이 예비 돼 있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은 최고의 삶이되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바울과 같이, 인생의 마지막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삶에 고난, 박해, 환란, 허기와낙담, 절망, 어둠의 골짜기가 있다 해도 물러서지 않고 피해 가지 않으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리며 믿음을 지키게 해 주옵소서.
의의 면류관을 소유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좋은 말씀 > 하용조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 (0) | 2017.09.27 |
---|---|
내 곁에서 강건케 하시는 주님 (0) | 2017.09.25 |
말씀을 전파하라 (0) | 2017.09.22 |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리라 (0) | 2017.09.21 |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의 이유(딘셔먼 집회 첫날) (0) | 2017.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