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하나님 경험(5)

새벽지기1 2017. 5. 18. 21:35


하나님 경험과 테니스


언제부턴가 테니스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건 라켓과 볼의 타점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는 뜻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체력적인 것인지 모르겠다. 볼을 정확하게 치려면 일단 자세를 안정적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체력이 예전같이 않으니까 그게 흐트러진다. 모든 운동이 그렇겠지만 테니스도 역시 하체가 흔들리지 않아야 상체도 역시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공과 직접 만나는 상체를 정확하게 유지하려고 해도 하체가 그걸 받쳐주지 않으면 말짱 ‘황’이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모든 게 흐트러지는 건 아니다. 모자라는 체력을 그 나름으로 효과적으로 운용하면 예전 같지는 않아도 거의 비슷한 상태를 끌어갈 수 있다. 문제는 체력이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옛날 같은 기분으로 테니스에 임한다는 것이다. 라켓의 스윙을 빨리 할 만큼의 체력이 모자라면 그것에 따라서 약간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마음만 앞설 뿐이지 실제로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라켓과 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자신의 체력을 충분히 감안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마음의 자세는 이런 체력의 저하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처럼 테니스장에 들어서면 늘 30대, 40대 기분이 된다. 네 다섯 게임을 계속해도 별로 힘들다고 느끼지 않던, 그 다음날 후유증도 거의 없었던 그때의 기분 말이다.


테니스에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약간의 기분과 정신 태도에 따라서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기분이 실제 운동 행위 자체에 영향을 마치는 걸까? 여기에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양한 해명이 가능하겠지만, 테니스의 토대에서 본다면 사람의 손에 잡힌 라켓과 테니스공과의 관계가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미묘하다는 데에 있다. 라켓과 공 사이에 무한에 가까운 빈틈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정확한 관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만약 이 빈틈이 단조롭다면, 선택지가 거의 없다면 여기에는 사람의 기분이 들어갈 수 없다. 예컨대 톱으로 나무를 자를 때는 기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무와 톱 사이의 관계가 단조롭기 때문이다. 나무가 정지해 있고, 그 나무에 톱도 이미 고정해 있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테니스공은 살아있으며, 그것을 잡아내야 할 사람도 역시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 사이의 관계는 아주 복잡할 수밖에 없다. 공과 라켓 사이의 빈틈이 그만큼 넓기 때문에 사람의 실력이 분간될 수 있다. 그 넓은 틈에서 어느 길을 따라가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는 말이다. 톱질의 실력도 나름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건 실력의 차이라기보다는 힘의 차이이고 또는 약간의 기능적인 차이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테니스공과 라켓의 관계보다 훨씬,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복잡하다. 우주의 크기만 하다고 할는지.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한다면 하나님과과 인간 사이에는 당연히 우주의 넓이만한 빈틈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는 그 관계의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테니스 초보자에게 라켓과 공의 관계가 거의 무질서하거나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처럼, 그래서 무조건 공을 향해 라켓을 휘두르는 데 머무는 것처럼 신앙의 초보자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보인다. 교회의 기본적인 질서를 가능한 빨리 몸에 익히고 그래서 교회 안에서 직분 상승을 꾀하는 것에 머무는 신앙은 신앙의 초보자들이 보이는 모습들이다. 테니스를 처음 배울 때처럼 신앙생활도 역시 그런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지만, 그래서 그것 자체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세월이 가도 역시 그런 초짜 신세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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