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권인목사

신앙은 삶이며 일상이다

새벽지기1 2017. 5. 13. 07:43


샬롬! 찬미예수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해 보면 갖가지의 추억들이 혼재되어 있다.

설 익고 무례하고 부끄러운 행동들도 젊음의 지성과 자유로 포장되어 은폐되는 시기였다.

그래도 고독한 실존의 삶은 만족해 하는 돼지보다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더 좋았다. 

신을 추구하고 본능보다 이성을 추구하며 현실 너머의 세계를 추구하며 신앙에 입문했다.

내 삶의 B.C와 A.D가 나뉘는 분수령이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은 민족, 예수 성시 화, 단추 하나에도 크리스천의 양심이 묻어 있고 예수를 먹고

예수로 꿈을 꾸는 나라 그러한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때의 그 진실함과 그 신앙의 열정과 그 순수함이라면 죽고 사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텐 스텝 교재에서 예수의 유일성,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에 대한 chapter 부분은 탁월하게 각인되었다.

T셔츠에 only Jesus라고 새겨 입고, 캠퍼스에서 삼삼오오 모여 율동을 하며 영감의 제창을 부르는 무리들,

영리를 전하는 특심한 사람들,

배지(badge)를 단 형제자매들이 검지 손가락을 펼치면서 샬롬! 하면서 인사하는 것은

아마도 초대교회 시절 마라나타의 인사만큼이나 우리의 신분과 자존감을 높이고 소속감을 높여주는 보증수표였고,

카타콤의 익투스(ΙΧΘΥΣ)의 표지만큼이나 결속 감을 주었던 대학시절이었다.

 

여름마다의 미루나무 숲에서의 수련회는 민족적 미스바의 회개운동에 비견되는 선교적 동질감과

공동체적 결속력을 다지는 출애굽 같은 거대 운동이었다.

그 당시 조선일보 한쪽 귀퉁이 자그마한 박스 란에 실렸던 예수 칼럼은 문학적으로 압축된 메시지의 핵심적 경구가 되었고, 그분 닮은 우리들의 언어와 기도의 패턴은 신앙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바로미터와도 같았다

 

그 후 40년이 족히 흘렀다.

예전 젊음의 시절엔 행동을 중심하는 신앙이었다면 결혼 이후의 삶은 저마다 굴곡진 인생의 드라마가 연출되고,

세월의 호된 메를 맞고, 예기치 않았던 불청객들로 심한 삶의 격정과 애환들을 겪기도 한다.

결혼, 자녀, 재정난, 건강, 사별과 이혼 등의 영적, 육적 마지노선을 걸으며 사경을 헤매는 중년의 삶은

살아내고 견뎌내야 하는 것 자체부터 신앙의 도전을 받는다.

이러한 부가된 대여섯 가지의 삶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변수가 된다.

젊어봤으나 늙어보지 않은 차이는 무엇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때보다 지금에 와서는 삶의 무게감이 다르니 신앙의 무게감과 깊이와 넓이도 다르다.   

신앙은 어떤 구호나 프로그램이나 운동(movement)이 아니라 신앙은 삶이며, 밥이며, 일상이라는 것,

신앙은 하늘의 것이지만 땅에 숨겨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앙은 나눔이며, 섬김이며, 관계의 소통이며, 책임지는 것이며, 헌신의 자리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앙은 이익보기보다 손해 보는 쪽이며, 챙기는 것보다 베푸는 쪽이며, 움키는 것보다 펼치는 것이다.

 

신앙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맞장 뜨는 것이며, 감당하는 것이며, 살아내는 것이다.

머리 되는 것보다 꼬리 되는 심정이며, 규격화 되고, 정형화 되고, 분리되고, 특수화 되는 것이 아니라 융화하고 묻히는 것이다.

 

신앙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그냥 사는 삶이 아니라 부활의 삶, 영생의 삶을 영원히 사는 것이다.


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