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의 생애를 간략하게 표현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신다.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1 하나님은 다윗을 양의 우리에서 이끌어 내셨다.
하나님이 다윗을 양의 우리에서, 목동의 신분에서 이끌어내심에서 먼저, 주목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다윗을 포함해서 모든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셨다는 것이다.
(신 8:4)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말썽을 부릴 때마다 하나님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도 애굽 땅(세상)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서 자녀로 삼으셨다.
우리가 어디로부터 누구에 의해서 이끌어 내심을 받았는지 확실한 인식이 필요하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망각할 때마다 우상에게로 세상에게로 달려갔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디로부터 누구에 의해서 이끌어내심을 받았는지 인식이 흐려질 때마다
세상과 우상과 사탄과 육신에게로 다시 달려가는 것을 본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책망은 우리를 향한 책망이고
그들을 향한 축복은 곧 우리의 축복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두 짝이 다 필요하고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구약의 선지서들을 설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책망들과 저주들로 고객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불편하게 할까봐 조심하는 거겠지요.
그러나 위로와 평안 속에서 그 영혼들이 썩어가고 지옥문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이스라엘인 것을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갈3:28-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은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의 복을 능가하는 완전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이기에 더욱 그렇다.
(엡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복 중에 으뜸되는 것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이를 위해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속량하여 주셨다.
(엡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영혼을 그의 피값으로 구원하시고 새롭게 살리셨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주셨다.
그리고 그 영원한 보증으로 믿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영원히 우리 속에 거하게 하셨다.
우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시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께서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
우리는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관심할 때가 너무 많이 있다.
오늘의 어려운 현실에 시선과 관심을 빼앗긴 나머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로부터 이끌어냄을 받았는지, 이를 위해 일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가 잊고 소홀히 하게 될 때, 곧 바로
우리 자신이 영적 침체에 빠져들고, 사탄과 세상과 죄에 얼마나 취약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릴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현실에만 코를 박을 때,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더욱 어렵고 꼬이기만 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망각할 때 흔들리고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초라하고 낮고 가볍고 경박할 때 마귀는 우리를 온통 흔들어 놓는다.
사단의 궤계를 물리치는 첫째 방법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는 것이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으로 마음과 행동이 돌아갈려고 할 때 무엇이 이를 막아 주겠는가?
다른 길,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어디에나 계시고, 영광과 위엄과 거룩으로 충만하신 분이신 것을,
바라보고, 그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이다.
이보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헛된 생각들을 막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의식할 때 우리는 또다시 빠져들기 쉬운 죄와 허물들을 물리칠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우리의 신분과 특권이 무엇인지를 항상 인식하고
그 앞에서 마음의 옷깃을 여밀며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기를 힘쓰시기 바란다.
요셉과 같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목적이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다윗을 ‘양의 우리’에서 젖 양을 기르는 중에서 취하여 택하셨다고 하셨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의 우리’에서 택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의 우리’인 것이다.
왕족으로, 귀족으로, 부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 부러워할 것 하나도 없다.
세상은 그런 것들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자기들은 무슨 특권이나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양의 우리에서 젖양 치는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하지만
그들은 그곳이 그리스도의 양의 우리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양의 우리에서 젖양을 기른 것은 후에 이스라엘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현실, 삶의 현장 하나 하나가 후에 이스라엘을 기르기 위한 훈련장인 것이다.
지금 주어진 양의 우리에서 충성하는 사람이 후에 이스라엘을 잘 지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윗을 보면, 양을 치면서 곰과 사자를 막아 내는 훈련을 한 것이 나중에
골리앗을 때려잡는 데 쓰임 받고, 블레셋과 원수들을 정복하는데 쓰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양의 우리’에서 경험하고 훈련 받은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물고기만 잡던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용하셨다.
많은 학문을 공부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신약성경의 상당 부분을 기록하게 하셨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게 하신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는데 사용하셨다.
지금 내가 속한 ‘양의 우리’를 사랑하시기 바란다.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업이든, 교회이든, 그 ‘우리’를 사랑하시기 바란다.
거기서 길러진 마음과 손의 능숙을 하나님이 사용할 날이 올 것이다.
2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다.
그는 양치는 목동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된 것이다.
양치는 목동에서 왕으로.
세상은 이 진리를 믿지 않는다.
왕에서 왕으로, 귀족에서 귀족으로, 부자에서 부자로만을, 그들은 믿을 뿐이다.
언제 저들이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가계도의 한 단계 내지 두 단계만 올라가 보아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또 오래 되었더라도 탐욕과 착취의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그들이 그것을 취한 동기와 방법과 수단들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조금 가지게 되고 오르게 되면 특권의식을 갖고 안하무인이 된다.
성경은 그러한 형통을 악인의 형통이라고 하며, 그들에 대한 심판과 멸망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은 아담의 후손으로 그 원죄와 악한 본성을 물려받았다.
성경은 사람의 조건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사람은 죄 가운데 태어났으며(시51:1),
본성적으로 타고 난 그런 죄된 상태가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한다(욥15:16).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창6:5)고 했다.
항상 악하며, 오로지 악할 뿐이기만 하다는 말씀이다.
사람의 속에는 언제나 죄의 냄새가 발동한다.
그의 정신이 언제나 악한 생각을 품고, 마음이 악한 욕심을 품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
(청교도 토마스 맨튼의 말이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다.
(마15:19-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이 악한 본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새롭게 된 우리까지도, 영으로써, 몸의 행실들을, 육신에 있는 죄들을,
죽이는 삶을 살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지체를 의에게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신다.
그런 악한 본성을 가진 자들이 뭘 지금 좀 가졌다고, 악인의 일시적인 형통을 가지고,
하나님이 택하신 ‘양의 우리’를 깔보는 것은 적반하장이요 자신들의 운명을 모르는 것이다.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과 우리의 신분과 특권을 모르기 때문에 행하는 어리석은 짓들이다.
이런 악인의 형통들을 보고 주눅들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소망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양치는 목동에서 왕이 되는 것이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 주님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긴 광야길을 가시는 본을 보이셨다.
사역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고, 제자들을 택하셨고, 예루살렘은 십자가 지기 위해 가셨다.
그 주님을 하나님은 높이셔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고, 모든 입으로 주라 부르게 하셨다.
우리 마음 눈이 밝아져서 우리가 받을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믿는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는 보아야 한다.
현재의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을 보시기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분이 복과 영광의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고난과 연단의 광야훈련을 거쳐 가나안 기업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받는 사람들의 부지런과 믿음과 인내를 본받아야 한다.
(신 8:15-16)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가게 하시지만,
하나님은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시고 있다.
낮추시고 시험하여 마침내 복을 주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를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삶을 살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실 것이다.
3 다윗은 마음(성품)의 완전함과 손(행함)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다.
그 마음의 완전함과 그 손의 능숙함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양치는 우리’와 ‘사망의 골짜기’에서 나왔다.
다윗은 어려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다. 시 23편을 보라.
우리도 하나님이 나의 목자인 것을 믿고 그래서 내게 부족함이 없을 것을 믿어야 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심을 믿어야 한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다윗을 본받아 우리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주의 지팡이(인도하심)와 막대기(징계)가 나를 안위하심을 믿어야 한다.
왕의 축복과 영광은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않고,
그에 이르는 고난의 과정은 싫다고 한다면, 그처럼 모순되고 앞뒤가 안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윗도 그냥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여 그가 왕이 된 것이다.
심는 과정 없이 수확의 결과는 있을 수가 없다.
양치는 우리도 싫다. 젖양 지키고 기르는 것도 싫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더욱 싫다.
그렇다면 그는 왕의 축복과 영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인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분의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내 이름과 내 의를 죽이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매일 지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말씀이다.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면서 광야 길을 걷게 했는데 통과한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다.
수가 적기 때문에 불신앙을 합리화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본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 길을 포기한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와, 그때 포기하길 잘했다, 원망 불평한 것이 좋았다 하고 있을까요?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할 수만 있다면 돌이켜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다.
이 육신의 장막을 입고 있을 때 우리의 믿음과 행함이
이 땅의 운명과 미래 뿐 아니라, 영원한 우리의 운명과 상급을 결정한다는 것을 유념하자.
그 광대한 광야, 불뱀과 전갈이 있는 사망 길을 걷게 하는 것은
다윗처럼,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그 완전함과 능숙함으로 그에게 맡길 이스라엘을 잘 지도하기 위함이다.
모세가 왕궁에서만 살았다면, 그 모습의 40세에 그의 결단만 보고 이스라엘을 맡기셨다면,
광야 길에서 어떻게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과 반역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출애굽의 큰 사역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그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을 길렀기 때문인 것을 인정할 것이다.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야곱 밑에서 편애와 특권 속에서 살았더라면 입애굽의 이스라엘 역사를 감당못했을 것이다.
억울한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에서 그도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을 이룬 것이다.
그것이 갖추어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총리로 세우셨고 그는 입애굽의 역사를 이루었다.
아브라함도, 욥도, 느혜미야도 다 고난의 연단을 통해서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을 이룬 것 아닌가?
그래서 크게 쓰임 받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 아닌가요?
왕의 영광은 ‘양의 우리’에서, 목동의 신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 믿자.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목동의 신분에서 왕의 영광으로 인도하심을 믿자.
광야 길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것이,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인 것을 믿고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그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으로 우리에게 맡길 이스라엘을 잘 기르고 지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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