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믿음 사랑 소망 (살전 1:2-7)

새벽지기1 2017. 5. 2. 14:35


믿음 사랑 소망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고전 13장은 순서가 믿음 소망 사랑의 순이다.

살전 1장은 순서가 믿음 사랑 소망 순이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말씀하고 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소망도 없다.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소망도 없다.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믿고 사랑할 수 있다.

 

1. 믿음에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개인적인 신념이나 철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신념도 역사하는 힘이 있어서 큰 일을 이루기도 한다.

자기의 사명을 선언하고 그것을 끝까지 신념으로 이룬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 믿음이 와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어지고 회개가 터지고 예수를 믿게 된다.

이 믿음을 구원 얻는 믿음이라 한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이 믿음이 다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너무 쉽게 인위적으로 믿음을 나눠주고 받는다.

아무나 붙들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고 한다.

 

듣기 좋은 말로 칭찬의 말로 아첨하는 말로 상대방을 기분좋게 해서 예수를 믿게 할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믿은 믿음이 얼마나 가겠는가?

성령이 거듭나게 해서 주신 믿음이 아니면 그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있을 수가 없다.

 

성령이 오셔서 새 생명을 주셔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죄를 깨닫는다.

그래서 회개가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과 영혼안에 주님으로 영접하게 된다.

믿는 것은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이다.

입술로 동의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오래 다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모태 신앙이라고 되는 것도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죄를 회개하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성령으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요3:5-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구원 얻는 믿음은 연약한 믿음으로 시작하여 확신의 믿음으로 성숙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것이지요.

에덤스라는 분이 말했어요.

손 힘이 약한 아이도 어른처럼 막대기를 잡을 수 있다.

수감자는 문틈으로 새어드는 햇빛을 볼 수 있다.

멀리 떨어지 곳에서라도 놋뱀을 본 자는 치유받았다.

가장 작은 믿음이라도 베드로나 바울의 믿음 만큼 소중하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며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뿌리이고, 확신은 그 믿음의 꽃이라 한다.

존 라일은 말했다.

뿌리 없이는 결코 꽃을 피울 수 없다. 반면 뿌리만 있고 꽃은 없을 수 있다.

-- 믿음은 삶과 같다. 삶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삶과 죽음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러나 인생의 끝날까지 연약하고 병약하며 고통스럽고 시련과 염려에 시달리며

기쁨과 웃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 있다.

확신은 단순한 삶 그 이상이다.

건강과 힘, 능력과 활기, 활력과 에너지, 패기와 아름다움이다”.

 

연약한 믿음은 죽음에서 살아난 귀하고 소중한 삶이지만,

그대로 머물면, 약하며 고통스럽고 시련과 염려에 시달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확신의 믿음은 건강과 힘, 능력과 활기, 활력과 에너지, 패기와 아름다움의 삶을 산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한 믿음에서 확신의 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의 믿음이 확신의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하는가?

존 라일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를 꺼리는 게으름 때문이다.

성결하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생활 때문이다.

 

확신은 부지런하지 않고는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확신의 빛은 양심과 행실에 거리낌 없는 사람에게 비친다고 한다.

 

5절 말씀이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

우리의 믿음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확신의 믿음, 성령과 능력으로 꽃을 피운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크다.

 

이 확신의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커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게 한다.

이 믿음이 역사하여, 모세로 하여금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택하게 하였고,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게 했다.

 

이 믿음이 역사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제물로 드리게 하였다.

믿음이 역사하여 다윗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믿음이 역사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은 견고한 여리고성과 아낙 자손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다.

 

우리에게도 믿음이 역사하여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도 믿음이 역사하여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이 견고하게 서고

여리고성과 거인들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다.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우리도 생애를 마치는 날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사랑에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믿으면 사랑하게 된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고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만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믿지 않는 사람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첫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둘째 계명을 지킬 수 있다.

(마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아름다운 사상과 말들이 왜 세상을 밝히질 못하고 어지럽게만 하는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 중심적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랑 타령, 정의 타령을 믿지 마시기 바란다.

 

그들은 말만 하고 사랑의 수고와 희생은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끼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수고와 희생을 하지 않는 사람의 사랑을 믿지 말라.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의 우리 사랑과 비교할 수가 없다.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엡2:4-6)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또한 우리 주님의 사랑은 당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는 사랑이셨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수고와 희생과 헌신이 없는 사랑은 말뿐인 사랑이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랑이다.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아낌 없이 줄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아들을 주셨다.

아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주셨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먼저 녹아져야 한다. 새로워져야 한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해야 하고, 사랑은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믿음의 역사로 나온 사랑의 수고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교회도 믿음의 역사로 나온 사랑의 수고로 하나가 되어 세워가야 한다.

머리로부터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되어 사랑의 수고로 세워가야 한다.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의 본질이 이것이다.)

사랑의 수고 없이는 가정도 교회도 회사도 국가도 세울 수 없다.

그러나 내 힘으로 하는 사랑의 수고는 지치게 되고 대가를 바라게 되어 끝이 좋지가 않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나오는 사랑의 수고여야 한다.

 

성령의 첫 열매가 사랑이다.

육체를 신뢰하고 육체로 한 사랑의 수고는 오래 가지 못하고 열매와 끝이 좋지를 않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골3:3).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한다.

(엡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 교회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 가자.

 

3. 소망에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교회는 부르심의 한 소망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엡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면 철새따라 감정 따라 환상 따라 유익 따라 옮겨 다니게 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훈련 시키는 가운데 광야에서나 가나안에서나 중심은 성막과 성전이었다.

광야에서 행진할 때도 유진할 때도 성막을 중심으로 하게 했다.

가나안에서도 성전을 중심으로 의식을 행하고 살게 했다.

 

하나님이 택한 곳에서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게 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일년에 3번은 꼭 성전에 와서 명절을 지키게 했다.

 

성막을 중심으로 살 때 하나님 중심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중심일 때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교회와 멀어지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교회와 멀어지게 돼 있다.

교회가 중심에 없으면 하나님도 중심에 없고

하나님이 중심에 없으면 교회도 그 사람의 중심에 없는 것을 본다.

 

신약 시대에 와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고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다.

우리가 교회에 속해 그분의 지체가 되었다는 의식이 없으면 그는 사생아이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교회 생활, 신앙 생활 하시면서, 이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교회로 하나님은 부르시고 지체가 되게 하시고 한 소망을 이루게 하신다.

각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한 소망 한 뜻이 있다.

한가족교회를 통해서 이루실 한 소망 한 뜻이 있기에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의 모든 소망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떠나서 가진 소망은 개인적인 야망이요 우상일 따름이다.

내 바벨탑을 쌓아서 그 중에 극히 일부를 동냥하듯이 교회에 내놓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고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 가득찬 곳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지혜를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세상에 다른 모든 조직이 없어져도 교회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다.

 

이 땅에 교회가 너무 흔해서 교회의 귀함을 모른다.

그러나 교회가 다 교회가 아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오래 되고 속한 사람이 많은 카톨릭을 교회라고 하지 않다.

 

신약 성경으로 개혁된 교회,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교회이다.

 

오늘날에는 다른 복음 다른 영으로 예배 드리는 교회가 많이 있다.

소망을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두지 않고

이 땅에서의 부귀와 영화에 소망을 두고

형통신학 믿음신학 신비신학으로 가르치는 교회가 많이 있다.

 

성경은 이 땅에서의 가나안도 약속하시지만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과 천국에 있다.

그 소망 안에서 이 땅에서의 가나안 기업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그 많고 어려운 시련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모든 사도들, 믿음의 선진들은 다 하늘에서 받을 이 면류관에 소망을 두었다.

그래서 시련을 겪으면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인내할 수가 있었다.

(약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참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시험과 시련에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다면, 때가 이를 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역사하며, 사랑으로 수고하며,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로마서 5장 말씀이 우리의 위로가 되시길 바란다.

(롬5:1-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은 우리를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의 소망에 대한 인침이고 보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분의 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어떤 환경과 역경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 안에서 살고 있다.

이제 우리가 바라고 소망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영광을 소망으로 바라보기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우리가 앞으로 받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의 잠시 받는 고난의 가벼운 것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룬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영광을 함께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인내하며, 믿음으로 역사하며, 사랑의 수고를 하자.